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아산-00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기행'/엄은화(1999/중도일보 기자),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대전충남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1
맹씨 행단(孟氏 杏壇)
House of Maeng's Family

 

대 지 위 치 ;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대 지 면 적 ; 7,856㎡
건 축 면 적 ;      93㎡

주 요 용 도 ; 주택
준 공 년 도 ; 건립/고려 말기(14세기 중엽)
                   중건/1642년
문화재구분 ; 사적 제109호(1963.1.21)

 명재상 고불 맹사성(孟思誠;1360-1438) 집안의 고택과 사당 등이 북향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구릉에 자리한 우리나라 고택 중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주변에 보호수인 은행나무 고목이 두그루 보존되어 있어 흔히 행단이라고 이르며, 돌담으로 에워싼 정원의 배치가 특이한 가옥이다. 맹씨 행단(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려말 충신이던 최  영 장군이 지은 건물로, 그의 손녀사위인 고불의 부친 맹희도/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는 설화가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다. 가옥의 형태는 'ㄷ'자형의 맛배집으로 목재는 광솔이 되다시피 그을렸으며, 또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정중앙에 장식되었고, 내실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다.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 이라 한다. 창건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개 고려말 경으로 추정된다. 조선조에 들어와 1482년에 안채를 중수한 기록과 1642년에 또 한차례 중수한 기록이 있어 이 두차례의 중수로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안채와 사당, 문간채, 살림채가 남아 있으며 그 중 안채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마을은 설화산(雪華山)을 주산으로 하고, 배방산(排芳山)을 조산으로 하는 주작과 현무가 축선을 형성하는 일직선 위에 배치되어 있다. 주산인 설화산은 봉우리가 다섯이 있다하여 오봉산(五峯山)이라고도 한다. 조산인 배방산은 마을 앞 내수 건너편에 단정한 산세로 앉아있다.
 맹씨행단은 마을 중간지점의 나지막한 구릉의 냇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는 전면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형상이다. 이 집을 처음 지었을 때는 서북향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크게 보수하면서 지금과 같은 북향에 가까운 좌향이 되었다. 맹씨행단의 평면은 정면4칸, 측면3칸의 '工'자형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옆으로 방을 배치하여 좌우대칭이다. 1고주 5량집 구조에 맞배지붕이다. 대청 전면에 퇴칸을 두고 전 후면은 문을 달아 두었으며,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대청의 양 측면에 각각 2개씩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전면의 것은 2칸으로 크고 후면의 것은 1칸의 작은 방이다. 종보 위에는 곡선형 솟을합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솟을합장은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건축에 흔히 쓰여진 기법으로 당시의 건물에는 거의 모두 이러한 방식을 선택하였다. 경내에는 맹사성, 황희(黃喜), 허형 등 3정승이 심은 행단이라는 은행나무가 있다. 또 옥피리, 옥비녀, 표주박, 인장 등의 맹씨 가문 가보도 전해지고 있다.
 맹사성은 고려와 조선시대 사람으로 우왕때 장원하고,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리로 많은 일화가 남겨져 있는데, 자는 자명이며, 호는 고불, 본관은 신창으로 온양출신이며, 고택자체가 청백리의 자태를 보여주듯 단아하고 간결한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2
아산 외암마을
Asan Oeam Maeul/Folk Village

 

대 지 위 치 ;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258외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역
대 지 면 적 ; 205,073㎡
주 요 용 도 ; 전통민속마을
준 공 년 도 ; 15세기-16세기 중엽
문화재구분 ; 건재고택/중요민속자료 제233호

 500여 년 전부터 강씨와 목씨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가, 예안 이씨의 종족마을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명종때 부터이다. 설화산을 주산으로하는 마을의 전체적인 형상은 동쪽이 높고 서측이 낮은 긴 타원형이다. 주택의 좌향은 거의 모두가 서남향으로 되어 있으며, 마을 안에는 인공수로를 만들어 여러 집을 통과하면서 생활 용수가 되기도 하고, 정원을 가로 지르는 곡수와 연못을 형성하기도 한다. 또한 화재시에는 소화수로도 쓰이었다. 이를 풍수에서 '염승'이라고 하는데, 마을의 주산인 설화산의 화기를 제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반촌의 구성요소인 교육시설, 의례, 신앙시설, 휴식시설, 생활 부대시설 등 공동체적 시설물과 민가가 한데 어울리어 조선시대 종족마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배치 형태는 충청지방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재고택은 흔히 '영암댁'이라고 부른다. 1800년대 후기 건립되었는데, 거의 평지에 가까운 대지에 행랑채를 두고 그 후면에 사랑채, 아채, 그리고 부속채 등이 있으며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ㄱ'자로 꺾여서 뜬 'ㅁ'자형 배치를 하고 뒷편에 가묘가 있다. 앞마당이 정원은 조선 말기의 특징이 보여지는 형태이다.
  천안 광덕산, 예산 덕숭산과 함께 충남 동북부의 명산으로 이름 난 설화산(설아산)의 감독 아래 형성 된 이 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 순천 낙양읍성처럼 원래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자연스러운 민속마을이다. 60여호에 이르는 이 마을 가옥들은 개발을 벗어나 지난 세기 가옥과 마을의 구조,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5세기경부터 목씨, 황씨 같은 겨레붙이들이 정착하면서 개막하였다는데, 이후 조선 명종때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  연 일가가 낙향 이주하면서 예안 이씨의 세거촌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후 구한말 규장각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공이 고종의 총애를 받다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조판서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여 이곳에 기거하자 고종이 하사하여 민속자료로 남아 있는 외암 참판댁을 지어 주었다. 이곳은 겉모양의 고풍 충만한 개성에 그치지 않고 내부의 빛나는 전통적 기풍과 역사 속에서의 위세를 잘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외암 마을의 풍수적 국면은 설화산을 주산으로 하고, 봉수산을 조산으로 하는 주작과 현무가 축선을 형성하는 중심축선상에 마을이 배치되어 있고, 설화산의 지맥이 마을의 양측을 휘감아 돌면서 청룡과 백호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좌우 중심축선의 교차점이 마을 중심이 되어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다. 송악면은 아산의 남쪽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차령의 기운 때문에 군내에서 가장 깊숙한 산간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마을의 행정구역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1구이고 속칭 '외암골'이라 한다.
 온양에서 유구를 거쳐 공주로 가는 길을 따라 8km정도 가면 송악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이곳 송남초등학교의 남측 담을 끼고 동측으로 약 1km를 들어가면 설화산 동남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외암리마을이 형성된 최초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옛날부터 취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미 500여 년 전에는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다. 이 마을은 온양군 남하면의 관하로 현 역말(驛村)에 시흥역이 있을 당시에는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라 하여 '오양골'이라 했다고도 한다. 외암리 마을이 예안이씨들의 동족마을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명종때 장사랑을 지낸 이 연(李 挻) 일가가 이곳으로 이주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후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를 배출함으로서 반가의 면모를 갖추고 반촌으로서의 동족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동족집성 마을은 종가를 중심으로 공동제사, 길흉행사, 농업생산 등의 공동행사를 통한 동족성을 강화하게 된다. 외암리 예안이씨 입향조인 연(挻)은 태사공 도(棹)를 시조로 삼는 전의이씨의 분적된 계통으로서 말하자면 시조로 부터 9대손인 예안백 혼(混)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로부터 9세손(시조로부터는 16세손)이 바로 외암리의 예안이씨 입향조 연이다. 이 마을이 '외암'이라 불리게 된 것은 입향조 연의 6세손인 이 간(李 柬) 선생에 의해서다. 이간 선생의 자는 공거(公擧)이고 호는 외암(巍巖)이다. 1677년(숙종3)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수암 권상하의 문인이 되었다. 그가 31세되던 1707년에는 관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에게 강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710년(숙종 36년) 장릉참봉으로 천거되었으나 임하지 않고 6년뒤인 1716년 자의가 되었다. 그 뒤 회덕현감, 경연관을 거쳐 충청도도사겸해운관. 세자익위사 익위 등을 지냈다. 선생은 설화산의 우뚝 솟은 영봉정기를 따서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로부터 후손들은 마을 이름을 '외암(外岩)'이라 칭하였다. 약한 구릉지에 배치된 마을은 입구의 물(다리)을 건너면서 가운데로 안길이 있고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동서로 긴 장축이어서 평면적으로는 타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배산이 되는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서는 완만하게 형성되어서 서쪽의 마을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주택의 좌향은 거의가 서남향으로 되어 있으며 간혹 남향인 것도 있다.
 외암리 마을과 관련된 개천과 인공 수로는 크게 두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자연적인 형태로서의 '물'과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형태로서의 '물'이다. 자연적 형태로서의 물은 설화산 계곡에서 마을의 남측으로 흘러 근대골내로 합수되는 개천으로 풍수적 국면에서 보면 내수구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로 인공적인 물은 마을의 상부에서 지수를 만들어 인위적으로 마을 안을 통과하게 만든 인공수로이다. 이 물줄기는 마을의 여러집을 통과하면서 생활용수가 되기도 하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곡수(曲水)와 연못을 만들기도 한다. 정작 화재시에는 소화수의 역할을 하였다. 이 인공수로는 풍수에서 말하는 '압승(壓勝)'이라는 방법이 사용된 예가 되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주산인 설화산은 '화산(火山)'으로서 마을에까지 그 불(火)의 기운이 미치게 된다. 불(火)과 상극하는 물(水)을 끌어들여 기(氣)를 제압하려는 의도로 그 근본 개념은 자연과 인간과의 상호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촌의 배치구성에 있어서 공동체적 시설물에는 교육적인 시설, 의례, 신앙적인 시설, 휴식시설, 생활부대시설이 있다. 이와같은 공동체 시설은 조선시대 반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구성요소이며, 마을은 이러한 구성요건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이 마을은 이러한 반촌의 구성요소와 민가가 한데 어울려 조선시대 동족마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가옥의 배치형태는 충청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참고문헌 ;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하나은행/1998 겨울호,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3
아산 외암마을, 참판댁
(參判宅)
Asan Oeam Maeul, Champandaek

 

대 지 위 치 ;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88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역
대 지 면 적 ; 205,073㎡
준 공 년 도 ; 조선 후기
문화재구분 ;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36호(2000.1.7.)

                   
 참판댁은 마을 중심에서 동쪽편에 배치하고 있는데 담을 사이에 두고 뒤쪽의 큰댁과 앞쪽의 작은댁으로 나뉘어 있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마을 가운데로 안길이 나있다. 참판댁은 마을 동편의 개천 옆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서편으로 꺾어 들어가는 골목을 들어가면 있다. 큰댁은 조선말 고종황제로부터 받은 하사금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이 집의 담을 접하면서 이어진 전면의 작은댁과 후면의 큰댁을 합해서 참판댁이라 하며 흔히 큰댁과 작은댁으로 구분한다. 이 두 집은 각각 행랑과 사랑채, 안채, 곳간 및 가묘를 갖추고 있는 배치구성에서 각자가 독립된 집이다. 이 두 집은 각각 행랑과 사랑채, 안채, 곳간 및 가묘를 갖추고 있는 뜬'ㅁ'자형 배치로 각자가 독립된 집이다. 큰댁은 중문에서 안채 대청이 바로 보이지 않게 가림벽을 두고 뒷마당 장독대에 낮은 돌담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은댁은 지붕이 모두 초가로 되어있다.
 큰댁은 안채와 사랑, 중간문 및 곳간채로 연결된 2동의 'ㄱ'자 평면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튼'口'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 남쪽에 떨어져 문간 및 행랑채가 약간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후정과 가깝게 담장이 돌려져 있고, 가묘는 안채의 서편에 약간 물러서 있다. 안채의 뒤뜰에는 담을 둘러친 장독대를 두었고, 동편에 우물을 만들어 두었다. 사랑채의 동편과 서편에 있는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랑채 좌우로 담을 둘러 안채와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외곽의 돌각담은 문간채 전면으로 둘려지고 대문앞은 좁은 골목길이 마을길과 이어진다. 행랑채를 겸한 솟을대문 좌우로는 방과 토방 부엌 광이 있고 안쪽엔 반칸퇴가 개방되어 연결되어 있다. 솟을대문은 그 높이가 다른 건물에 비해 매우 높아 집주인의 위엄을 상징하는 듯하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는 가운데 1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을 배치해 두었다. 정면열은 퇴칸으로 만들어 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후면에는 좁은 쪽마루를 달아두었다.
 동측의 익랑채에는 곳간과 헛간, 중문간을 두었다. 'ㄱ'자로 구성된 안채의 서측은 남단으로부터 부엌, 안방, 웃방, 고방이 이어지고, 2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건너방을 두었다. 안대청과 건너반 앞에는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았다. 건너방 옆에 반칸폭의 작은 부엌을 사이에 두고 또 하나의 방이 이어졌다. 큰댁에서의 몇 가지 특징은 중문에서 안채 대청이 곧바로 보이지 않게 가림벽을 둔 것, 뒷마당 장독에 낮은 돌담을 둘러서 들짐승의 출입을 막게 한 것, 세살로 짠 분합문 내의 대청이 집 몸 채에 비해 좁은 반면 대청후면 장판문위로 벽장을 내달아 대청에서 사용하게 한 것 등이다.
 외부공간은 크게 2개로 나누어 이 두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행랑채를 담으로 감싸는 '밖(남성공간)'이며, 다른 하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배치되는 '안(여성공간)'이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중심사상인 유학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배치구조임을 읽을 수 있다. 작은댁은 큰댁 서남쪽에 담을 두고 연접해 있다. 배치의 기본적인 구조는 큰댁과 같이 대문이 있는 행랑채를 정면에 두고 'ㄱ'자형 사랑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큰댁과 같이 튼 '口'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본채의 동편에 곳간채와 가묘를 배치하고 안채의 서측 모서리 후면에 작은 장독대를 담으로 둘렀다. 큰댁과 구조적으로 다른 것은 문간채와 사랑채가 초가로 되어 있는 점이다. 사잇장지로 구획한 큰사랑과 대청의 전면으로 퇴마루가 이어지고 사분합을 들어열개로 개방하여 넓은 공간을 시원하게 활용케 한 평면구성이다. 뿐만 아니라 초가이면서도 목구조 기법이 다른 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손색이 없다. 정면 5칸의 사랑채는 정면열을 퇴칸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2칸을 큰사랑방으로 하고, 사랑방 동측 1칸을 대청마루로 만들었다. 큰사랑방 서측 1칸은 부엌칸이고, 부엌칸 서측은 작은 사랑방이다. 사랑대청에서 꺾어져 후면 1칸은 부엌칸, 그리고 작은 방하나를 더 두었다. 안채는 4칸통의 대청을 두고, 왼쪽의 안방은 아래 위 3칸으로 구성되고, 웃방 뒤편에는 반칸통의 툇마루가 있다. 대청에 면한 웃방벽 전체를 사분합으로 내어 불발기창을 달았다. 부엌에 설치된 판장문과 사롱창 광창 등이 농가의 풍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건넌방 앞의 높은 마루와 난간은 그 중에서도 격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규모로 보면 큰댁보다 작지만 배치형태와 건물의 구성은 큰댁과 유사하다. 그러나 큰댁과 근본적인 차이는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라는 것이다.
 외부공간의 구성에 있어서도 전면에 사랑채와 문간채를 두고, 후면에 안채와 곳간채를 두었다. 이 두 공간 사이는 담으로 구분하여 유학적 덕목인 남녀유별을 공간적으로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4
온주 아문(溫州 衙門)
Onju Amun/Gate

대 지 위 치 ; 아산시 읍내동 817, 아문159-6, 동헌 159-2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
지역
주 요 용 도 ; 관아
준 공 년 도 ; 조선시
고종 8년(1871)
문화재 지정; 충남유형문화재 제 16호(1973.12.24.)

 조선시대 온양군(溫陽郡)의 관아 건물로,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2층 문루(門樓)와 동헌이 있는데, 아문은 1871년(고종 8년)에 세워졌으며, 동헌은 여러 차례 변형되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건물이다. 온주아문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으로 위층은 누각이고 아래층은 통로로 되어 있다. 신라 때인 663년(문무왕 3년)에 온양군의 이름을 온주(溫州)라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따라 온주아문이라 붙인 듯하다. 낮은 기단 위에 사각형의 기초석을 갖춘 높이 1.5m 높이의 사각뿔 모양의 주형(柱形)초석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배열하여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설치하였으며, 4면에 난간을 둘렀다. 위층의 누마루는 계자난간을 돌렸고 공포는 2익공 계통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외출목(外出目)은 없으며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아문에서 50m 정도 북쪽에 있는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 동헌으로 쓰이다가 1928년부터 일제의 주재소, 광복 뒤에는 파출소로 사용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온주동사무소로 사용하였으며 1993년에 수리하여 복원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평면이며 장대석 한벌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덤벙주초를 두고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무출목(無出目) 초익공으로 우물천장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이곳에는 원래 조선시대 온양군의 향청(鄕廳), 객사(客舍), 무학당(武學堂)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 2동(棟)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5
현충사(顯忠祠)
Hyeonchungsa/Shirne

   

대 지 위 치 ;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지 역 지 구 ; 자연녹지
지역
주 요 용 도 ; 기념관
준 공 년 도 ; 1706년
문화재 지정; 난중일기 국보 제76호, 장검 보물 제326호

 1492년 임진왜란시 구국의 성웅으로 국가위기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으로, 박정희 대통령시기에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 중수되었다. 온양 온천에서 4Km 떨어진 방화산 기슭에 위치하여, 1706년(숙종 32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이듬해 숙종이 친히 현충사란 이름을 내렸다. 1932년 이충무공 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다시 지은 후,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정부에서 성역 (547,297㎡)을 크게 확장하고 성역화하였다. 본전 안에는 이순신장군의 영정과 일생 기록화인 십경도가 있으며 난중일기(국보 제76호) 등과  장검(보물 제 326호) 등이 전시된 유물관, 이 충무공이 살던 옛집, 활터, 정려 등이 경내에 있다. 또한, 현충사에서 서북쪽으로 9km 거리인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에 충무공 묘소가 있다. 현충사의 아쉬운 점은 전면 조경이 일본식 정원으로 전지를 하는 왜향나무로 꾸며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식 정원에서는 나무를 다듬어 놓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기에 많은 지적을 받고있다.

참고문헌 ; A Guide to the Chungnam Tourism,

 

006
석조 약사여래입상(石造 藥師如來立像)
Seokjo Yaksayeoraeipsang/Buddhist Statue

대 지 위 치 ;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산2-4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
지역
규          모; 높이4.4m
준 공 연 도 ; 고려시대 초기
문화재 지정; 보물 제536호/1971.7.7.  

 커다란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장륙불상(1장 6척, 높이 4.4m, 머리길이 1m, 어깨폭 1.7m, 가슴폭 1.96m)이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다소 긴 불균형스러운 불상이지만, 얼굴이나 옷주름의 뛰어난 조각 솜씨 때문에 우수한 불상으로 돋보이고 있다. 갸름하고 단아한 얼굴, 맵시있는 이목구비, 잔잔한 미소 등은 고려시대의 독특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불상의 체구가 직사 각형이면서 평판적이지만 손이나 팔, 어깨와 다리를 서투르게 표현하 지 않은 점이나 옷주름의 유려한 솜씨 등으로 당시의 석불상으로 드물 게 우수한 모습을 표현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선이 구불 거리는가 하면 기하학적인 좌우대칭성을 잘 지키고 있고, 힘없이 흐늘 어진 선인가 하면 무릎 등 동심원의 강조점을 표현한 옷주름선의 특징 있는 표현은 얼굴의 단아한 형태미와 함께 고려시대 석불상을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임을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더구나 두손을 가슴 앞에 모아 약합을 받쳐들고 있는 수인은 중생들이 앓고 있는 심신의 온갖 병마를 없애주는 자비로운 의왕인 약사여래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어서 많은 참배객들을 부르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을 다듬어 조각한 불상으로 평촌리 산중턱의 옛 절터에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양쪽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불상의 자비로움을 더하고 있으며, 입술은 다른 부분보다 작고 얇게 표현되어 인상적이다. 가슴부분에서 모은 두 손은 약그릇을 감싸고 있는데, 이를 통해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원해 준다는 약사여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옷은 발목까지 덮고 있으며 좌우대칭을 이룬 옷주름의 표현이 독특하다. 선으로 표현된 상반신의 옷주름은 평행의 띠주름이 좁은 간격으로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다. 하반신은 신체 정면에서 3가닥으로 구분되어 U자형으로 조각되었고, 양 무릎에는 동심원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표현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극도로 형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릎에 표현된 옷주름은 삼화령 미륵삼존불과 영주 석교리 석불상(보물 제116호) 등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간혹 나타나던 독특한 수법이다. 사실적 표현에 충실한 얼굴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좌우대칭으로 규칙적인 옷주름, 짧은 목과 움츠린 듯한 어깨, 꼿꼿이 서 있는 자세 등에서는 다소 형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고려 초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007
윤보선 전대통령생가(尹潽善 前大統領生家)

Former President Yun's Birth House

 

대 지 위 치 ;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96호(1984.12.24)
준 공 년 도 ; 1907년

 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친 윤치소씨가 1907년 지은 것이라는데, 바깥 사랑채는 건축양식으로 보아 1920년대로 추정된다. 넓은 평지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동남향의 집이다. 마을 앞으로 관대천이 동북으로 흘러 관대리에서 합수되어 서쪽으로 빠진다. 이 마을에는 약 120여 가옥이 낮은 구릉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가옥은 사랑채·안채·문간채·행랑채를 비롯하여 부속채가 '巴 '자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의 문간채를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가 문간채와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행랑마당 동측에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 주위로는 담을 둘러두었다. 행랑채 중간에 달린 중문을 들어서면 'ㄱ'자 평면의 안채가 안마당을 감싸듯 자리잡고 있다. 안채 후면의 낮은 구릉은 화계로 처리하였다. 문간채와 행랑채는 측면으로 익랑이 길게 이어져 'ㅋ'자 모양이 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이 사랑채는 가옥내 다른 건물에 비해 늦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정면열의 반칸은 마루를 길게 두어 대청과 이어지게 하였다. 서측 1칸통에는 마루방을 두고 그 후면에 방을 내달아 평면이 'ㄴ'자 모양이 되었다. 대청과 마루방의 바닥은 모두 쪽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의 정면 창호를 모두 유리문으로 달아 두었다. 기단은 잘 가공한 장대석 두벌대로 만들고, 방추형 초석에 기둥은 방주를 썼다. 기둥 모서리에는 쇠시리로 모양을 냈다. 기둥머리에는 주두를 놓고 운공형 무익공을 끼웠다. 보머리와 운공에는 당초문양을 조각해 두어 매우 장식적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크기는 다른 건물에 비해 클 뿐만 아니라 내부의 대청마루 문은 폭이 큰 미서기문을 달아 내부공간을 크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안채는 'ㄱ'자 평면으로 가운데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했다. 양 측면에는 각각 부엌을 두었다. 전면열에는 퇴칸에 마루를 두었다. 안대청 마루는 사랑채와는 달리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장대석 두벌대로 만들고, 방형초석에 방주를 썼다.
 이 가옥에서는 문간채와 행랑채가 특히 크다. 이 두 건물은 서측 익랑이 연결되어 있으나 이어지는 부분이 서로 어긋나고 축선도 맞지 않아 건립시기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문간채는 정면열 8칸, 측면열 7칸의 'ㄱ'자 평면이다. 정면열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그 좌우에 창고·문간방·부엌 등을 배치해 두었다. 맞걸이 3량집구조로 외부의 하방벽에는 벽돌을 사용하였다. 행랑채는 정면열 6칸, 서측열 6칸으로 가운데 중문을 두고, 나머지는 행랑방, 마루방, 곳간이다. 이 가옥은 부속건물인 문간채와 행랑채가 각각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대부분 반가에서는 행랑채에 문간을 설치하거나 문간채에 행랑기능을 결합하여 하나의 건물로 만드는데 여기서는 행랑채 기능과 문간채 기능을 분리하여 따로 만들어 두었다. 이 가옥의 사랑채는 안채에서 떨어진 곳에 배치하여 마치 별당과 같은 형식이 되었다. 이는 사랑채를 지역문화의 중심공간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의도 였던 것 같다. 내부공간을 사용목적에 따라 큰 공간으로 전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 또한 그러한 의도로 생각된다.
 안마당의 구조는 'ㄱ'자 안채와 'ㄴ'자 행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놓여 튼 '口'자 집을 만들었다. 안채의 뒤뜰은 구릉을 화계(花階)로 처리하였고, 안채의 동편은 담을 넓게 확보하여 안채공간을 여유있게 처리하였다. 이 가옥에서는 또한 살림집이면서 붉은 벽돌은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문간채, 행랑채, 담장에 붉은 벽돌을 특히 많이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건축물에는 그리 흔히 사용하지 않았다. 벽돌을 사용해 만든 백제의 분묘가 있고, 건축에서는 바닥벽돌로 사용할 정도였다. 벽돌이 건축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후기로 22대 정조때 화성(華城)을 축성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후 궁궐과 사가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 가옥에 벽돌을 많이 사용한 것은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의 기술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근대적인 건축기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끼친 영향이기도 하다. 사랑채의 주요구조부는 전통적인 조선양식을 하고 있지만 마루바닥은 쪽마루로 깔고, 전후면에 유리문을 달아 한양절충식을 하고 있다. 근대적인 건축기술이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일제때 지은 반가지만 조선후기의 장식적 특징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배치구조와 외부공간 구성에서는 중부지방의 구성을 한 상류주택이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8
윤일선 가옥 (尹日善 家屋)
Yun Ilseon's House

 

대 지 위 치 ;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2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2호(1986.11.19)
수          량 ; 2동

 윤탁구씨 소유의 주택으로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윤씨 일가가 공동으로 쓰는 솟을대문을 이용하여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ㄱ" 자형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튼 "ㅁ"자의 평면구도를 갖고 있다. 안채는 통칸으로 된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한쪽에 안방과 부엌이 있고 다른 쪽에 건넌방이 있는데 건넌방은 대청보다도 훨씬 높은 툇마루를 두어 변화 있게 구성하였으며, 사랑채에는 일부 장대석 기단도 남아있는데 지붕은 입작(入作)지붕이다. 기둥을 비롯한 재목들이 전반적으로 가늘지만 각 방들이 비교적 넓게 꾸며져 있어 조선말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중부지방의 양식을 갖고 있는 집이다.

 

009
윤승구 가옥 (牙山 尹勝求 家屋)
Yun Seunggu's House

 

대 지 위 치 ;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24-1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5호(1989.12.31)
수          량 ; 3동

 신항리 해평 윤씨 일가들이 지었던 상류층 가옥중의 하나로 종가댁으로 지칭된다. 남으로 발달한 낮은 언덕 위에 윤씨네 집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작은 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는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윤일선 가옥이 있으며 이 가옥과 인접해서 윤승구 가옥이 있고 위에 윤제형 가옥(충청남도 지정 민속자료 제13호)과 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그 옆으로 중문이 달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간채가 달려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문간채의 끝에 맞추어 담장을 쌓았으며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평면이다. 중앙부분에 2칸통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1칸의 건넌방, 왼쪽으로는 2칸의 안방을 들였고 안방 앞으로 1칸의 부엌을 들였다. 또 안채의 왼쪽 담장 너머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치마 팔작지붕의 별채가 있다. 대체로 잘 손질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기초를 마련하였고 기둥은 네모기둥을 썼으며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010
성준경가옥(牙山 成俊慶家屋)

Seong Jungyeong Residence

 

대 지 위 치 ;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 528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94호
준 공 년 도 ; 1825년(순조 25년)

 1989년 보수공사때 상량문이 발견되어 1825년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는데 현 주인 성하현(成夏鉉)의 4대조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세운 것이다. 남쪽으로 도고산이 솟아 그 자락이 북으로 흘러 이 가옥을 감싸듯 끝자락을 내리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농경지가 넓게 펼쳐지고 그 한쪽에 도고저수지가 있으며 북쪽으로도 낮은 구릉과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서편으로는 도고산 자락이 뻗어 약간 감싸듯 솟았다가 끝자락을 내리어 주변의 지리환경에 이 가옥은 도고산을 등지고 북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넓은 대지에 자리한 이 가옥은 원래 12동의 부속채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 사랑채, 안채, 문간채를 비롯하여 행랑, 바깥채, 창고 등이 남아 있다. 배치는 전면에 'ㄴ'자형 사랑채를 두고 후면에 'ㄷ'자 모양의 안채를 배치하였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문간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가옥은 '巳'자모양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의 동편에 곳간과 서편에 바깥채(방앗간, 쟁기고)를 두고 있다. 사랑채 동편에는 작은 행랑을 두고, 서북쪽으로 작은 창고, 측간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전면열은 퇴칸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대청마루와 방을 두고 그 좌우에 하나씩 온돌방을 두었다. 동측 온돌방은 후면으로 길게 만들어 이 때문에 사랑채의 평면이 'ㄴ'자 모양이 되었다. 정면열의 퇴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고, 서측면에는 좁은 쪽마루를 달아 두었다. 정면 퇴칸에는 덧문을 달아 추운 날씨에 대비하도록 했다. 사랑채 앞에 막돌로 3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초석은 정면열에는 원형, 나머지는 모두 덤벙주초를 썼다.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주요 구조재료는 다른 건물에 비해 약해 보인다. 특히 기둥은 6.5치각을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 후면에 문간채를 붙여 안채와 사랑채를 막아주고 있다. 이러한 배치 때문에 사랑채 바로 뒤에 작은 샛마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샛마당을 지나면 안채로 진입하게 된다. 안채는 'ㄷ'자 평면이다. 안대청과 안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익랑을 붙여 두었다. 정면 5칸중 3칸통은 안대청으로 하고 2칸은 안방이다. 안방 정면의 1칸은 대청마루를 연결하여 대청평면이 'ㄴ'자 모양이 되었다. 안대청 정면에는 유리문을 달아 두었다. 양측 익랑에는 각각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안채의 기단은 막돌 두벌대로 약 1자반 높이로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방주를 썼다. 기둥의 크기는 사랑채의 그것보다 큰 7치각이다. 무고주 5량집 구조이며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