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보령-00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한국관광공사 홈사이트,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1  
남포읍성(藍浦邑城) 및 관아문(官衙門) 진서루(鎭西樓)
Nampoeup Fortress & Gate

 

  

대 지 위 치 ;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1
주 요 용 도 ; 읍성 및 관아
준 공 년 도 ; 조선 태종조
문화재 지정; 읍성/충남 기념물 제10호, 관아문/충남 유형문화재 제65호   

 남포초등학교 뒷편에 있는 이 읍성은 고려 때부터 있던 곳으로 조선 태조때에 축성하기 시작하여 태종 때 완성하였다고 한다. 방형으로 쌓은 평지 석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를 2,476척, 높이 12척, 여장높이 3척, 적대 5개소, 옹성문 3개, 그리고 성내에 샘이 2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읍성의 전체 둘레는 894m이고, 동 서 남벽 중앙에 각각 문이 있었던 자리와 옹성 흔적이 남아 있다. 남포읍성은 지형적으로 동고서저(東高西低)에 맞춘 읍성이며 왜적에 대비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서해바다를 향해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읍성의 배치계획에 따라 관아 정문인 진서루(鎭西樓)와 관청인 외동헌, 내삼문 등이 모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포 관아문(藍浦 官衙門)은 남포읍성 내에 위치해 있는 관청의 정문으로 조선후기 중건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으로 건물의 높이가 높고 구조가 견실하다. 내삼문은 정면 7칸, 측면 1칸의 관아 내문이다. 가운데 1칸은 지붕을 높인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 문의 좌우 협칸은 벽으로 막지 않고 살창을 설치하여 내동헌이 보이게 하였다. 동헌(東軒)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열과 북측열에는 퇴칸마루를 길게 연결해 두었다. 기둥은 전면 열은 원주를 쓰고, 나머지는 방주를 사용하였다. 공포는 무출목 초익공을 짜 올렸다. 지방 관아건물로 규모가 크고 견실한 모습이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002
남포향교(
藍浦鄕校)
Nampo Hyanggyo/Study Room

 

  

대 지 위 치 ; 보령시 보령시 남포면 옥동리 산9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역
재          료; 목조, 한식
소          유; 충남향교재단
문화재구분; 지방기념물 제111호/1997.8.31.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지방의 교육을 위하고 문묘제향(文廟祭享)을 위하여 고을마다 세워져서, 중앙에서 훈도(訓導)가 파견되어 지방 중등 교육을 담당하던 기구이다. 이 향교는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웅천읍 대천리에 건립되었다가, 이어 남포지역으로 이전되었고, 그 후 몇차례 이전한 끝에 현종 9년(1843년) 현재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 너른 계단이 놓인 펼쳐진 입구를 올라선 건물의 배치는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서재(書齎)를 갖춘 전학후묘(前學後墓)의 일반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5성과 4현, 우리나라 18현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곳이며, 명륜당은 강학하는 강당이다. 본 향교에는 동재(東齋)는 없고 서재만 있는데, 이곳은 강학공간이면서 향교의 관리 기능을 담당하는 고직사(庫直舍)를 겸하기도 하였다.

 

003
오천 충청수영 객사(鰲川 忠淸水營 客舍)

Chungcheongsuyeong Guesthouse

대 지 위 치 ;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661
문화재구분; 지방유형문화재 제136호(1991.12.3.)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구          조 ; 목조              

 조선시대 충청수영 안에는 수십 동의 영사가 있었는데, 1895년 폐영과 함께 모두 소실되고 객사, 공해관의 삼문, 진휼청만 남아있는데, 이 건물은 오청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건물을 옮겨온 것이다.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두차례씩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건물명은 운수헌(運壽軒)으로 건물 앞에있는 삼문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의 삼문을 보존하기위해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004
오천성(鰲川城)

Ocheon Fortress

대 지 위 치 ;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지 역 지 구 ; 준농림지역
문화재구분; 지방문화재 제9호
준 공 년 도 ; 1510년              


 오천은 백제 때부터 '회이포'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로 통일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서 이름이 높았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수군이 주둔하기 시작하였으나, 수영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이다. 조선 초기에 충청수영이 설치된 후, 중종15년(1510년) 성이 만들어지고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의 본거지가 되었다. 건립 당시 4개의 문이 있었고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오천수영 수군은 이순신장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진주대첩에서 퍠하면서 충청수군에게 비극적인 전투가 되고 말았다. 당시 고립된 진주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충청수사 황진과 휘하의 수군 대부분은 옥쇄했던 것이다. 이후 오천성은 텅빈 채로 방치되면서, 1896년에 수영이 폐지되었다. 지금은 돌아치인 서문에 해당하는 망화문지와 백성을 돌보던 진휼청,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장교청과 1,650m정도의 성곽 만이 남아있다. 오천성은 당초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중종 5년에 이장생이 16년간에 걸쳐 돌로 축성하였다. 오천항에서 오천성 위에 올라서면 천수만과 오천항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시야 확보가 유리한 장소임을 알수 있으나, 바다 바닥에 암초가 많이 있어 선박의 진출입이 용이하지는 않다 한다.

 

005
성주사지 석탑(聖住寺址 石塔)

Seongjusa Site, Stone Pagodas

 
사진;유병구

대 지 위 치 ;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문화재구분; 5층석탑-보물 제19호/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서 3층석탑-보물 제47호/1963.1.21.
준 공 년 도 ; 통일신라시대              

 성주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하는데, 현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절터만 남아 있다. 5층 석탑은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중앙 3층석탑은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서편 3층석탑은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으로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있었다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