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부여-00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홈사이트,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1
정림사지(定林寺址)
Jeonglimsaji/Temple Sit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외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규         모 ; 59,245㎡
준 공 년 도 ; 백제(538년-660년), 고려
문화재구분 ; 사적 제 301호/1983.3.26.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직후 세운 중심사찰이 있던 자리로, 일제시대 발굴조사 당시 강당터에서 출토된 기와조각에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當草)'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정림사터임을 알 수 있다. 태평8년은 1028년(고려 현종19년)으로 정림사는 고려 때 절 이름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으나 백제 때의 절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가람으로서 남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축선 상에 배치되고 주위에 회랑이 연결되어 있다. 중문 남쪽에는 남문이 있었으며 그 앞 양쪽에 연못이 있고, 금당은 2중 기단에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차양칸이 있었다. 본래의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절 가운데에 네모난 연못의 운치가 사뭇 다르고 한가로워 보인다.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추정된다. 강당 터에는 1028년 정림사 중수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있다. 절터에는 이밖에 동북부에서 문터, 건물터, 배수구, 기와적층이 발견되었고, 중문 밖에서는 방형의 연못과 남문터가 확인되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8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002
정림사지 5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
Jeonglimsaji 5th floors Stone Pagoda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석탑
규          모 ; 높이/8.33m
준 공 년 도 ; 백제(538년-660년)-고려/7세기 초
문화재구분 ; 국보 제9호/1962.12.20.

 정림사 창건 때 만들어진 5층 석탑은 익산 미륵사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탑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된 판축 위에 세웠다. 석탑 구조는 지대석을 놓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세우고 상륜을 올렸다. 기단부는 목조 건축의 기단과 비슷하며 이 밖에 각 층 모서리 기둥에 보이는 배흘림 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지붕, 지붕모서리 부분의 살짝 들려진 곡선 등에서 목조건물을 단순화시킨 변형된 목조가구 기법의 특징이 보이고 있다. 현존하는 백제석탑 2기중 하나로, 앞선 시기의 미륵사탑에 비해 규모도 작으며 탑을 형성하는 석재의 수도 훨씬 줄어 들었다. 탑의 몸통에 비해 지붕의폭이 놃어 외견상 목조구조와 흡사하며, 세부양식에도 목조가구가 나타난다. 2층이상의 체감률이 심해 더욱 날렵한 모습으로 보이고 넓은 지붕과 더불어 안정과 변화를 동시에 연출하고 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도 약화, 미화되어 목조탑 모방에서 벗어난 석탑으로 정형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탑은 백제사람들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현존하는 5층의 석탑중에서 비례구성과 구조수법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바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려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는데, 목조건물의 형식이 특이하고 세련되어 창의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
다.
 이 석탑은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흐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특히 탑의 전체적인 모습이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003
정림사지 석불좌상(定林寺址 石佛坐像)
Jeonglimsaji/Buddhist Statu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석불좌상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문화재구분 ; 국보 제108호/1963.1.21.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004
부소산성(
扶蘇山城)
Busosanseong/Fortress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외
주 요 용 도 ; 산성
규          모 ;
983,598㎡ 표고 106m          
준 공 년 도 ; 538년(백제 성왕 16년)
문화재구분 ; 사적 제 5호/1963.1.21.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사비로 천도한 후 쌓은 부소산성은 백제가 처음으로 나성을 둘러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도성의 개념을 실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북쪽의 백마강을 자연의 방어벽으로 삼고, 외성과 내성을 두어 2중 방어벽을 구축하였다. 동쪽과 서쪽에는 나성이 연결되어 남쪽에 전개되는 시가지를 둘러쌌다. 현재 성의 둘레는 약 2.2km인데 성안에는 백제때 군창터, 수혈병영지, 절터, 남문터 등이 발굴되었으며, 영일루, 사비루, 고란사와 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산성 안 남서쪽에는 절터가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서쪽 산중턱에 있어서 서복사라 부른다. 발굴조사 결과로 백제의 1탑식 가람임이 밝혀졌다. 산성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문으로 추정되는 터가 남아 있다. 이 중 남문으로 추정되는 건물터는 문루형식의 건물이었으며 그 양옆에 석축벽이 남아 있었는데 여러 번 중수와 개축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에서 고려시대까지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년)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년)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년)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터 양측에는 일정한 구간에 석벽을 쌓고 석축면에는 약3.5m 내외의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석축에 물려 세우게 했는데 위에는 방책판을 세웠던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비문은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부소산성의 정문이다. 이 문은 1986년 11월 건립된 70㎡규모의 목조건물로 팔작(八作)지붕 3간, 측면 2간의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005
무량사 극락전(無量寺 極樂殿)

Gukrakjeon of Muryangsa/Temple

대 지 위 치 ;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66
지 역 지 구 ; 산림보존지구
규         모 ; 1층-정면5칸, 측면4칸
                   2층-정면3칸, 측면2칸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창건/고려 초기
                   중건/조선 중기,17세기경
문화재구분 ; 보물 제 356호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제 185호,
                   무량사 석등;보물 제 233호/1963.1.21.

 무량사는 만수산(575m)이 동, 북, 서 방향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아늑한 절이다. 아름드리 괴목과 숲들이 울창하고 탑과 전각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불교가 성행했던 백제의 고도 부여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무량사에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무량사는 신라 문성왕(839년-856년)때 범일(810년-889년)국사가 창건했고 신라 말의 고승 무염(801년-888년)선사께서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당시 세워진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그 후 고려 고종(1213년-1259년)때 크게 중창되었다.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인조 때 중건하였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대지에 전각들이 여유 있게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5층 석탑을 중심으로 북편에 주불전인 극락전이 있고, 동편에 명부전, 서편에 영산전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건물로 내부는 상·하층 구분 없이 만들었다. 기둥은 배흘림 있는 원주를 세웠다. 네 모서리의 1. 2층 추녀에는 활주를 받쳐 두었다. 공포는 다포식이면서 1, 2층 형식을 다르게 만들었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하였다. 내부의 불단은 내진주 후면 세칸에 만들고 3존불을 안치하였는데 아미타여래좌상과 좌우협시불에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이 정좌하고 있다. 5층석탑은 고려 초기 양식으로써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단은 단층기단에 면을 둥글게 깍은 면석받침을 돌리고 면석을 세웠다. 면석에는 모서리에 우주(隅柱)와 가운데 탱주(撑柱)를 세웠다. 탑신부는 덮개돌과 받침이 각각 별도로 만들어졌고 옥개석 받침에 3cm정도의 홈을 파서 탑신이 끼워지도록 하였다. 이 탑은 옥개석 추녀 밑 곡선, 옥개 주변의 구조, 안전감을 보여주는 채감율 등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극락전은 우리나라 목조건축중 유구가 적은 2층의 중층건물중 하나이며, 극락전과 석등, 석축이 정확히 일직선상에 위치하는 평지형 사찰로 백제계 건축성격을 띄고 있다. 다포계 양식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중앙엇칸에 비하여 끝으로 갈수록 주간이 좁아지고, 상층에서는 1층에 비하여 기둥의 높이가 아주 짧게 구성됨으로써 급격한 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같은 독특한 외관 비례는 다른 중층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며,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중층건물과 흡사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기둥 사이를 나누어 놓았는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그 얼마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을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으로 막아놓았다.

 
무량사는 그 위치나 지리적인 조건으로 볼 때 백제시대의 사찰로 짐작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다. 절에는 아직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절 입구에 그의 부도탑이 있다. 임진왜란 때에 절이 불탔으며,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다. 조선시대에 이 절에서는 많은 경전이 간행되었다.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인 극락전에는 동양 최대의 불좌상이라고 하는 아미타 여래삼존상이 있다.

 

006
민칠식 가옥(閔七植 家屋)
MInchilsik Residenc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왕중로 87 (중정리 537-1)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주택
준 공 년 도 ; 건립/1705년-숙종 31년
                   중건/1829년-순조 29년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92호

 사랑채의 기와에서 '숭정 87년(崇禎八十七年. 1705년)'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건립년도가 추정되었는데, 이 주택을 수리할 때 상량문에서 '숭정기원후4을축(崇禎紀元後四己丑)'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1829년에 크게 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옥 뒤로 급한 구릉이 있고, 전면은 마을과 들로 형성되었다. 마을은 여흥 민씨와 용인 이씨가 주성을 이루고, 타성들이 함께 거주하는 혼성마을이다. 이곳에 민씨가 터를 잡게된 것은 민칠식씨의 4대조인 민용묵 때 부터이다. 현재 이 가옥에는 정침을 비롯하여 행랑채, 그리고 서측에 노비가 거처하던 초지집이 있다. 정침은 '口'자 평면으로 앞쪽에 사랑채, 뒤쪽에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 정면은 양쪽으로 사랑채와 곳간이 길게 빠져나와 있는 '날개집'이다. 날개집은 영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면이지만 충청지방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는 담으로 구획하였다. 사랑채는 3개의 방이 'ㄴ'자로 배치되고 동측에 대청마루, 서측과 북측에 마루방이 각각 배치되었다. 사랑방 전면에는 퇴마루가 대청마루와 서측 마루방을 연결하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가운데 2칸에는 안대청을 두고 대청을 중심으로 서측에 안방과 부엌이, 동측에 3칸의 큰 마루방이 날개로 붙어 있다. 안방과 안대청마루 앞으로는 퇴마루가 놓여 있다. 이 가옥 서측에 별도로 담을 둘러 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지집이 본채와는 좌향을 약간 달리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평면은 3개의 방을 두고 대청마루 앞뒤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007
고란
사(皐蘭寺) 와 낙화암(落花岩)
Goransa & Nakhwaam/Temple & Cliff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
지 역 지 구 ; 자연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백제시대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부소산의 낙화암 아래 백마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하며, 백제 시대에는 왕이 노닐던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절은 고려 시대 때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벼랑에 위치한지라, 절의 규모는 크지 않다. 하지만 낙화암의 전설과 절 뒤편의 암벽에 고란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와 그 암벽에서 자란다는 희귀한 고란초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절 이름도 뒤편 암벽에서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왔다. 이곳 약수는 백제의 왕실에서 길어다 마셨다는 어용수라고 한다. 백제가 멸망 할 때(660년) 수많은 궁녀들이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부소
산성 북측에 위치해 있는 고란사(皐蘭寺)는 창건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삼천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고란사 법당 건물은 조선 후기인 1797년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008
궁녀사(宮女祠)
Gungnyeosa/Shrin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성 내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사묘재실
준 공 년 도 ; 1965년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시절,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삼천명이 백마강 바위 위에서 몸을 던졌는데, 이 모양새가 꽃잎이 떨어지는 듯하다 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고 불리웠고, 1929년 이 바위 윗편에 궁녀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백화정'을 지었다. 그 후 삼천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65년에 지은 사당으로, 낙화암과는 거리가 좀 떨어진 부소산성 남서쪽에 있는 사당이다.

 

009
궁남지(宮南池)
Gungnamji/Pond Garden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대 지 면 적 ;  45,528㎡, 둘레 1,377m
준 공 년 도 ; 백제 시대, 고려
문화재구분 ; 사적 제135호/1964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1km 지점인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는 사적 135호로 선화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백제 무왕이 만든 정원의 못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이 궁녀들과 함께 풍류를 즐겼다는 이 연못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지금도 바람결 따라 일렁이고 있다. 연못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의 의미를 담은 작은 섬과 정자가 있고, 물위에 구름다리가 걸려있으며, 못 둘레에는 버드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무왕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금성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영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평야 한가운데 못을 팠다고 전한다. 물론 당시에는 풍수지리설이 없었으므로, 후대에 덧붙여진 전설로 추정된다.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는 포룡정이다. 이곳에는 서동의 어머니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궁궐 남쪽에 사는 한 여인이 어스 름한 달밤에 잠을 못이루고 연못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때 갑자기 못 에서 물결이 일더니 용이 나타나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 후 태기를 느낀 여인은 열달 뒤 서동을 낳았다. 포룡이라는 이름은 용과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무왕 35년(634년)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들여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한가운데에는 중국 전설에 나 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조원사(造苑史)에 삼신산을 조성한 최초의 기록이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조원기술이 가장 뛰어 나 노자공이 612년 일본 황궁의 정원을 꾸며 아스카시대 정원사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이 연못은 당시 삼국 중에서도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 났음 을 알 수 있다. 현재 못 둘레는 1,377m이며 1965년에 못을 정비하고 1971년에 섬 위에 누각과 다리를 건립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이 전설을 하나의 은유로 보고 있다. 용은 곧 임금이고 서동은 임금과 미천한 신분의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서자라는 주장이다. 서동은 왕의 밀명을 받고 서라벌 정탐을 위해 신라에 잠입했다가 미모의 선화공주 에게 반한다. 서동이 적국의 공주를 손에 넣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던 노래가 바로 향가 '서동요'이다. 서동을 밤마다 안고 잔다는 노래 때문에 공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이에 서동은 공주를 얻는다. 왕위에 오른 서동은 20리 바깥에서 물을 끌어와 어머니가 살았던 궁 남쪽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은 인공적으로 동그랗게 또는 네모 반듯하게 꾸며진 것이 아니라 물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연못 모양이 자연스럽게 형성 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3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연못이 천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조금씩 흙으로 메워져 크기가 1/3정도로 줄어들었다.

 궁남지는 백제 궁성의 한 별궁에 속한 궁실의 원지로서, 이 못은 주민들에 의하여 '마래방죽'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되어 왔고 자연적인 못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간 백제 문화의 다방면에 걸친 연구 결과로 백제시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궁남지로 명명하였다. 이 후 이 연못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세인이 주시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궁남지는 본래의 면적이 약 3만여 평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었으나 깊은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매립되어 농경지화 하였다. 이 후 나머지 9,500여 평도 매립될 위기에서 사적지로 지정되어 일부나마 보존된 것이다. 1965년 7월 정부에서 이에 대한 일부 복원 공사를 실시한 결과로 현재의 규모로 보존되고 있는데 13,772평으로 축소되어 있으며, 이의 정화 공사는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며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짐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그 아이 이름을 서동이라 하였으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마동이란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한 이 설화에 따르면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와 서동요를 퍼뜨려 결혼한 후 후사가 없는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다. 이와 같은 설화 내용에서 남지변이 별궁지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궁남지가 별궁 원지란 점이 암시되는데 이는 설화적인 한계성이 있음을 살피게 된다.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이 부합되지 않는데, 삼국유사는 무왕의 어머니가 집을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지었다는 것이고, 삼국사기는 무왕 35년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팠다는 점인데 이는 이미 있던 연못을 확장하였거나 고쳐 수축한 내용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선 임류각을 살펴 보면 '동성왕 22년(500년) 봄에 임류각을 궁성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었고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이 있는데 현재 그 유구들이 학술조사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안압지보다 74년이 앞선 동성왕 때의 일이며, 안압지와 임해전은 문무왕 14년 2월의 일이나 궁남지가 40년 앞서 조성된것이다. 무왕이 연희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궁남지, 측근의 군수리 폐사지는 임해전과 안압지 및 천주사지와 서로 비교되는 공통적인 유사점이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안압지는 궁남지의 모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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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북정(水北亭) 과 자온대(自溫臺)
Subukjeong & Jaondae

 

대 지 위 치 ;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산 147-2
문화재지정 ; 사적 제14호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부여읍에서 서쪽으로 백마강을 가로지른 백제 대교를 건너면 바로 규암(육바위)이다. 1960년대 백제대교가 놓이기 이전까지만 해도 인근지역의 교통 중심지로 백화점이 있을 정도로 흥행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스쳐가는 조그만 촌락으로 쇠퇴하였다. 수북정은 이 백제대교의 규암쪽 입구 강변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로 원래 수북정이 세워진 바위산의 명칭은 여섯 개의 바위가 모여있다하여 육바위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백제의 도성을 침공할 때, 당나라 군사들이 사비 도성내의 상황을 엿보던 장소로 이용한데서 연유된 이름이 곧 '엿보던 바위' 즉 '엿바위' 라고도 전해 오는데, 한문으로 번역되어 엿볼규(窺)자와 바위암(岩)자를 사용하니 규암이라는 지명이 유래 되었다 한다.
 이 정자는 조선조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내셨던 김흥국선생이 건립하였다. 선생의 자는 경인(景仁), 호는 수북(水北)이며, 휘는 흥국(興國)이시다. 조선 시대 명종 12년(1557년) 한양에서 태어나 선조 22년(1589년)증광문과에 등제한 후 홍문관 정자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고 북평사를 거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도 왕래하였으며, 회양, 영변, 한산, 양주 등지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양주 목사를 지내던 무렵, 광해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공빈 김씨의 소생이며, 1608년에 즉위하여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나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로 여생을 마치었다. 인조반정을 꾀하던 서인의 주도 세력자인 김 유, 이 괄, 이 귀 등이 광해군의 난정에 반기를 들고 김흥극 선생을 찾아 반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을 때, 거부하고 낙향한 곳이 바로 백마강반(白馬江畔) 수북정이다.' 수북정이라는 정자는 선생이 자신의 여생을 마칠 때까지 쓴 거실 겸 서실이며, 후학을 양성할 장소로 이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라 수북정이라 불렀다 한다. 인조가 즉위한 후에 김흥국 선생을 부제학으로 소명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이곳에 계속 머물르며 후배 양성에 전력하다가 1623년 3월에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에 있다. 사망 후로도 수북정은 후손들의 교육 장소로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으며, 수차의 중창을 하였으며 현존한 건물은 1969년에 부여 군수 전준기씨가 전면 해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백제대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수북정 옆의 규암진은 1945년까지 배다리를 띄워 놓고 건너 다녔으며, 그 후로는 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군들이 일본 상륙작전에 사용하였다는 철제 부교를 옮겨 교량으로 사용하였으나 차량이나 수레 등은 넓은 배에 실어서 도강하는 관계로 많은 차량이 도강을 기다리는 불편함은 겪었다. 백제대교가 수북정 바로 옆에서 부터 건설되니 소통은 편리하지만, 수북정의 경관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수북정의 청람과 규암진의 귀범은 부여의 팔경 중에도 으뜸이었으나, 현재는 지난 날의 정취를 찾아 보기 힘들다.
 조선말기까지는 수북정 아래에 청풍정과 읍청정이라는 부여현과 홍산현의 관원이 주재하던 정자가 있었다. 이들 관원은 공세미의 보관 창고를 관리하며 선박을 이용한 운송 업무를 담당하여 주재하던 곳이다. 교통과 수송 수단으로 수로를 이용하는 선박이 최선의 방법이던 당시에 금강 상류로부터 수십 척 혹은 수백 척의 돛단배가 오르내리던 장관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하다. 20여년전까지만 해도 백마강의 유서들은 모두 황포 돛대를 높이 달고 노를 저어 운행되었으나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수북정 앞에 깎아 지른 절벽으로 솟은 바위가 바로 '자온대'이다. 자온대는 옛 부여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오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이 이 바위에 나와서 노실 적에 간신배들이 미리 와서 이 바위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하였으니 후에 임금이 와서 보고 저절로 따뜻하다 하여 자온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 남부여조와 비슷한 내용으로, '사자강 언덕에 한 개의 바위돌이 있는데 십여 명이 올라 앉을 만하다. 백제 왕이 왕흥사에 예불하러 갈 적에는 먼저 이 돌에 올라 부처님께 망배하는데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하여서 이름을 돌석(구들돌)이라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민간 전설에는 '의자왕이 여가를 즐기실 때에는 낚시질을 좋아하셨는데 그 터가 바로 수북정 아래 자온대 바위였다.' 왕께서 낚시질을 나오실 때 쯤이면 미리 알아차린 조정의 간신배들이 임금님이 앉으실 바위 밑에 숮불을 피워 돌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가 임금님께서 도착하실 무렵이면 숮불을 모두 강에 쓸어 넣어 버렸다. 낚시를 즐기시던 왕께서 앉아 있는 자리가 점점 따뜻하여져서 식을 줄을 모르니 하도 이상히 생각하여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임금님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푸심이 지극하시어 하늘의 뜻으로 앉아계신 바위가 더워지는 줄로 아옵니다"라고 답하였던 것이다. 임금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이 바위는 스스로 더워지니 그 이름을 자온대라 하시오" 라고 하였으며, 간신들은 임금님의 환심을 독차지 하고 정사를 어지럽히여 백제의 국력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의 바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자온대라고 써서 글씨를 새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왕께서 강건너 왕흥사로 예불하러 가시거나 백마강변에 낚시질 하러 가시는 일은 자주 있을 만한 얘기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 중에 왕께서 직접 말을 터고 사냥을 나가시는 기록이 많으니 여가에 도성 근처의 강변에서 고기를 낚으며 자연을 벗삼아 명상에 잠기는 때도 있었을 것이다. 기록과 전설에 나오는 자온대와 돌석은 모두가 따뜻해지는 바위돌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위치가 과연 수북정 아래에 있는, 자온대라 새겨놓은 곳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고홍사준 선생의 말에 의하면 '왕흥사지는 현재 규암면 신리의 왕안이 부락인 바, 왕이 왕흥사에 예불행차 도중에 멀리서 부처님을 향하여 절을 했다면 현재 자온대의 위치와는 거리와 방향이 맞지 않으며 예불행차의 길도 구교리 부소산 옆의 구드래 나루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구드래 혹은 구들내라는 지명의 연원은 돌석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돌석을 우리말로 구들돌이요, 구들은 온돌에 까는 돌을 말하며 구들내(구드래)는 구들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요, 일본인들이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는 것도 이 구드래에서 기인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자온대가 수북정 아래에 있는 바위인지, 아니면 구드래에 있었고 현재는 물 속에 잠겨 있는 가마바위인지는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