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부여-01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기행'/엄은화(1999/중도일보 기자),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011
부여 동헌(扶餘 東軒)
Old Buyeo Government Offic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28-4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관아
준 공 년 도 ; 조선 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 유형문화재 제 96호/1982.8.3.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 건물로 동헌, 객사, 내동헌 등이 있으며, 현재 부여문화재연구소(옛 부여박물관) 경내 입구쪽에 남향바르게 자리하고 있다. 동헌은 당시 부여현의 공사를 처리하던 장소로, 고종 6년(1869년)에 지었고 1985년에 중수하였다. 동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도 하는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왼쪽 3칸은 대청으로 판벽을 치고 문을 달았으며,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 툇마루를 놓았다. 정면에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결려 있으며 '제민헌'이라고도 한다. 현감의 처소인 내동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3칸의 대청과 그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들였다. 인근에 있는 백제시대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은 듯 싶으며, 경내 보수공사로 주변이 어지롭다. 

 

012
부여 객사
(扶餘 客舍)
Buyeo Gaeksa/Guest Room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6-1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객사
준 공 년 도 ; 조선 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 유형문화재 제 96호/1982.8.3.

 동헌과 같이 지은 객사는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사신이나 관리를 접대하고 유숙시키던 곳으로, 정당과 익실을 두었다. 동헌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으며, 궐패를 두고 대궐을 향해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중앙에 한층 높게 세운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그 좌우에 있는 동서익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정당의 대청에는 궐패를 모셨고, 익실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양쪽 익실의 지붕은 가운데 정당보다 지붕을 한 단계 낮게하여 건물의 모양만으로도 각 실의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6,70년대에 부여박물관 진열실 등으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변형되었으나 기본 구조는 남아있으며, 처마에는 봉황머리와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였다. 부풍관이라고도 하며 지금은 ‘백제관(百濟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013
의열사(義烈祠)
Euiyeolsa/Shrin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3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대 지 면 적 ;  3,782㎡
주 요 용 도 ; 사묘재실
준 공 년 도 ; 조선 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 문화재 자료 제 114호/1984.5.17.

 읍내의 작은 동산인 군민공원 남측 기슭, 부여 향교 뒷편에 있는 백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 후기의 충신 이존오를 기리기 위해 부여현감 홍가신이 세운 사당이다. 이후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선비 정택뢰, 인조 (재위 1623-1649)때 문신 황일호(1588-1641)를 추가로 모셔 현재는 6명을 모시고 있는데,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 선조 8년(1575년)에 처음 지어 인조 19년(1641년)에 새로 고쳐 지었으며, 고종 3년(1866년)에 철거되었다가 그 후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원래 용정리의 망월산에 있던 것을 1971년에 지금의 남령공원으로 옮긴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014
부여 향교(扶餘 鄕校)
Buyeo Hyanggyo/Study Room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44-1외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대 지 면 적 ;  3,782㎡
주 요 용 도 ; 향교
준 공 년 도 ; 조선 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 기념물 제 125호/1997.12.23.

 정림사지와 인근하여 부소산편의 구릉에 자리한 부여향교의 설립시기는 정확히 모르지만 조선 초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부여읍 구교리의 서쪽 기슭에 세웠던 것을 18세기 중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는 수학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앞쪽에 있고,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뒤쪽에 있어 전학후묘의 구조로 되어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천장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현들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외의 건물로 공부방인 수선재와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 앞에는 다른 내삼문과는 달리 세 곳으로 나누고 협문을 두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지금은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015
사자루(四疵樓)
Sajalu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99호
준 공 년 도 ; 1919년 이축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로,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곳이다. 백제때는 이곳에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皆山樓)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이름을 사자루라고 하였다. 겹처마의 팔작지붕인 이 루는 정면 3칸에 츠면 2칸으로 2층에 누각을 설치하였다. 현판 글씨는 건물 정면에는 이조말 의친왕 이 강(李 堈)공이 쓴 '사자루'가 걸려있으며, 강쪽으로는 김규진(金圭鎭)이 쓴 '백마장강'이라는 멋진 현판이 걸려있다. 누각에 올라보면 사각이 트여있어 부여를 조망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루각을 세울때에 이곳에서 정지원(鄭知遠)이라는  이름이 세겨진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016
영일루(迎日樓)
Yeongilru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101호
준 공 년 도 ; 조선 후기, 1964년 이축

 부소산 동쪽 산봉우리에 자리잡은 이 지점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멀리 공주의 계룡산 정상인 연천봉이 아스라히 보여서 그곳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맞이 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을 옮겨 세우면서, 이름을 영일루로 바꾸었다. 기단은 정갈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1단으로 쌓고, 주춧돌은 키가 큰 8각 장초석을 썼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하고, 기둥위의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으로 쌓아 올렸다. 아래층의 기둥이 특히 높아서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건물의 폭에 비하여 우뚝 솟은 듯한 느낌을 주는 키가 큰 루가 되고 말았다. 

 

017
백화정(百花亭)
Baekhwajeong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용          도 ; 누각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108호/1984.5.17.
준 공 년 도 ; 1929년

 낙화암은 백제의 700년사직이 무너지던날인 660년(의자왕 2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왕을 모시던 3천명의 궁녀들이 그 몸을 지켜 여기 천인절벽의 바위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백마강에 원혼을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렇듯 망국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바위로, 낙화암 꼭대기에 있는 육각형의 백화정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당시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세운 것이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북쪽 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세워진 탓에 구조는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으며,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해 었두며,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화무늬를 그려 놓았다.

 

018
삼충사(三忠祠)
Samchungsa/Shrin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40-1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115호
준 공 년 도 ; 1957년

 이 사당은 백제말 의자왕(641-660)에게 충성을 다한 성충(成忠:?∼656), 흥수(興首)공과 계백(階伯:?∼660)장군 등 삼충신의 의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7년에 세웠으며, 1981년에 중건한 사당이다. 1979년부터 시작된 중서부 고도분화 개발계힉의 일환으로 사당을 중건하고 주변을 보수 정화하였으며 매년 10월 백제문화제와 더불어 삼충제(三忠祭)를 지낸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처마가 유난히 많이 돌출되어, 전체적으로 가벼운 느낌이 들면서고, 더욱 정면의 모습이 우아해 보인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애쓰다가 투옥돼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며,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군사가 황산벌로 처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장열히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장군이다.

 

019
수혈 병영지(竪穴 兵營址)
Presumed Barracks Sit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준 공 년 도 ; 백제시대/1991년 시설

 1980년 발굴된 3개의 움집터 중에서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 지표아래 풍화암층을 깊이 70-90cm 깎아 내려가 방바닥을 이루었으며, 평면은 네모꼴로 한변의 길이가 약 4m이다. 남쪽변 중앙에는 출입계단이 있고 그 양쪽에 기둥 구멍이 있어 출입시설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부소산성 내에서 처음 발견된 수혈식 건물지로 주변의 목단과 토성에 둘러쌓인 지점 등으로 보아 군사적 방호를 위한 병영시설로 추측된다. 이 움집자리는 아궁이 바닥에서 출토된 백제토기의 뚜껑과 집 주위에서 출토된 무구류 등의 유물로 보아 5-6세기 백제 병영의 집자리로 추정된다. 1991년 이 유구의 전시를 위하여 원래의 유구위에 전시관을 세우고, 그 옆에 추정 복원한 움집을 세웠다.

 

020
군창지(軍倉址)
Site Of Military Storehous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109호
준 공 년 도 ; 조선 후기, 1964년 이축

 부소산성 동남쪽에 있는 백제때 지어진 창고터를 비롯하여, 함께 조선시대에도 사용한 창고터로, 평탄한 대지위에 건물을 'ㅁ'자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동쪽과 서쪽의 건물은 정면 10칸, 측면 3칸의 건물이고, 북쪽 건물은 정면 18칸, 측면 3칸의 길다란 평면의 건물이었다. 남쪽 건물은 훼손이 심하여 확실치 않으나, 서쪽 건물쪽으로 치우쳐 안마당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때의 사각형 및 원형 주춧돌과 조선시대의 분청사기 및 백자조각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불에 단 6종류의 곡식은 조선시대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미루어 이 부근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에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나, 유사시에 필요한 피난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