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부여-02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기행'/엄은화(1999/중도일보 기자),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대전충남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충청 마을지킴이-당진문화원/1999',백제역사유적 자료실

 

021
능산리 고분군(陵山里 古墳群)
Neungsanri Tombs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연   면   적 ;  23,335㎡
문화재지정 ; 사적 제14호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부여읍에서 논산방면 국도변 3Km지점에 백제시대의 왕족 혹은 왕능으로 추정 되는 고분 총7기가 있으며, 특히 동하총의 사신도 벽화가 유명하다. 고분군 입구에 백제고분 모형전시관을 세워 당시대 고분의 변천과 묘제(墓制)를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능산리 뒷산 남쪽 기슭에 일군을 이루고 있는데 앞 열에 3기, 뒷열에 3기가 전후 좌우로 정열되어 있고, 맨 뒷편에는 보가 작은 고분 한 기가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고분들은 전하기를 왕릉이라 하며, 옛 지명도 능뫼 부락이라 하였다. 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 학자인 구로이다씨가 2기, 세끼노씨가 1기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이다. 그후 1917년에 노모리씨가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 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서 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에는 우메하라씨에 의해서 전왕릉군의 동쪽마을 뒤에서 동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5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은 동.서와 중앙에 각각 1군을 이루어 3군으로 총 16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그들 가운데 중앙부에 일군을 이루고 있는 전왕릉군 7기만이 현재 사적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조사된 고분들은 잘 다듬은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는데 현실과 연도로 구분되는 두 개의 방으로 된 횡혈식 석실분들이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라고 생각되는데 백제 후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들이었다. 특히 동하총은 벽화분으로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들 고분 가운데 특수한 천정 양식을 보여 준 대표적인 고분이다.
 동하총 고분의 봉터 직경은 27m로 봉토 아래에는 할석을 2.3단 쌓은 호석이 봉토 연변을 따라 돌려져 있다. 현실은 장방형으로 앞뒤가 길며 네벽과 천정에 벽화가 있다. 현실의 크기는 3.25mⅹ1.51m의 평면에 높이는 1.94m인 상자형 방이다. 각 벽석과 천정석은 각각 한 매의 큰 판석으로 물갈이를 하여 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는데 북벽과 동벽은 편마암을 썼으며 기타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였다. 바닥은 전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전돌을 가로 세워 한 단 높여서 관대를 설치하고 관대 아래에는 배수로를 구축하여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현실 내의 벽화는 주 . 황. 적. 흑색으로 네 벽에는 사신도를, 천정에는 날으는 구름과 그 구름 사이에 연화문을 예리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그렸다. 다시 말해서 북벽은 현무. 남벽은 주작. 동벽은 청룡. 서벽은 백호 등 사신도를 그리고, 천정의 연화문만은 아직도 선명한 반면, 서벽의 백호는 머리 부분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고 기타의 벽화는 적외선 사진으로 약간 나타날 뿐이다. 현실 전방의 입구에는 연도를 두었는데 연도의 길이는 3.7m, 폭 1.43m, 높이 1.68m로 현실과 접해서 바깥 쪽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차츰 벌어지고 있다. 현실은 거대한 1매의 방형판석으로 폐쇄하고 연도는 방형의 전돌을 쌓아서 막았으며, 연도의 좌우 벽은 할석을 쌓고 회를 발라 벽면은 회벽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묘제는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후기 고분과 통하고 있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영향이 백제 후기 묘제에 반영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상총과 기타 고분의 현실 평면은 약 3.25m, 폭은 1.45m로 장방형을 이루고 높이는 1.7m인데 벽면 형성은 양 귀를 크게 접어서 5각형으로 결구하였다. 좌우 벽과 뒷벽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 판석으로 조립하고, 상단부의 귀접이 한 벽석은 좌우 수직 벽위에 눌러 얹어서 안으로 기울인 후 천정석을 덮었다. 둥측은 약간 치우쳐 있는 연도는 길이다 약 1.1m에 불과하나 현실과 연도를 각각 판석으로 폐쇄하였다. 이러한 고분 양식은 부여 지방에 대종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는데, 주목되는 점은 현실 중앙 바닥에 높이 17cm 의 석상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목관과 관뚜껑의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시신의 머리 쪽에는 장식구로 보이는 금동제 파편들이 집중되어 있는 점이다. 목관 옆과 주위에서는 머리 부분만 도금된 못과 꽃 모양으로 된 크고 작은 도금 장식구 10여 개와 옷에 장식하였던 금실 몇 오라기가 수습되었으며, 기타 송곳 모양으로 된 쇠붙이도 2점이 발견되었다. 또한 부식된 배 모양 조각들고 확인되었는데 이 고분도 도굴된 상태였다. 관장식구에는 다양한 문양을 투각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적인 요소는 각 장식금구마다 심볼로 나타나고 있다. 중하총은 천정 구조가 터널형으로 되었고, 각 벽은 회를 발랐으며, 서하총은 중상총과 구조가 거의 같으나 연도가 거의 중앙부에 있으며 동.서 고분군의 구조는 중상총. 서하총과 같은 구조로서 여러 장의 치석된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다.

 

022
대조사(大鳥寺)
Daejosa/Temple

 
  

대 지 위 치 ;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764
높         이 ; 10m
재         료 ; 화강석
문화재지정 ; 미륵보살 보물 제217호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서남방을 방비하였던 임천면 군사리 구읍의 진산인 성흥산성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도 공격을 피할 만큼 난공불락의 요새인데, 이 성흥산성 안에는 백제 성왕 5년부터 5년이나 걸쳐 창건하였다는 대찰 대조사(大鳥寺)와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이 절의 창건동기에 대한 전설은, 대조사의 미륵불이 있는 자리에는 당시 큼직한 거암(巨岩)이 하늘에 우뚝 솟아있었는데 그 바위 아래에는 오래전부터 한 노승이 작은 암자를 짓고 살었다. 어느 봄날, 양지 바른 이곳에서 노승은 참선삼매에 들어 있다가,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노승은 꿈 속에서 한마리의 큰새가 서쪽에서 날아와  황금빛 찬란한 빛을 발산하면서 지금 절 있는 곳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 이 새는 암자 뒤 큰 바위를 향하여 계속 날개를 저었다. 그러자 햇빛에 반사된 한줄기 광명이 그곳 바위에 집중되더니 그곳에 관세음 보살의 상이 나타났다. 이후, 노승은 계속해서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는 것이었다. 이를 성주에게 알리자, 성주는 반신반의 하며 산에 올라와 그 바위 앞에 다가서 봤다. 그러자 큼직한 바위 전체가 찬란하게 빛나며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놀란 성주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합장 기도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성왕은 감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왕은 장차 서울을 협소한 웅진으로부터 광활하고 산수의 미를 곁들인 소부리(지금의 부여) 로 옮길 마음을 가졌던 터라, 그렇게 되면 성흥산성은 수도의 서남방 중국으로부터 침공하는 적을 막는 중요한 곳이 될 것으로 믿었다. 이때부터 그자리에 불력(佛力)으로 국가 안녕과 수호를 비는 큰 절을 짓기로 하였다. 많은 사공(寺工)을 동원하여 성왕 5년 4월 초파일 석가여래의 탄생일을 기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절의 창건불사는 국영으로 규모가 큰 공사였으므로 애당초 십년의 세월이 소요될 듯 하여 사공을 주야로 투입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그러자 밤마다 새가 날아와 주위를 밝혀주어 밤 일을 낮과 같고, 피로를 씻어주는 새 소리를 들으며 일할 수가 있어 공사는 성왕 10년 4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에 준공하였다 한다. 공기가 절반으로 단축되어 열린 준공법회가 끝날 무렵, 처음 황금빛의 큰새가 내려앉아 울었던 그자리에 세워진 탑에서 큰 새가 나타나더니 서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이 일로 대조사란 이름을 짓게된 이 절은 그로부터 웅진으로부터 소부리로 천도한 백제 수도를 지키는 성흥산성의 영장으로서 존속하였으며, 백제의 많은 성들이 18만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을 때도 적병을 접근 못하게 신술을 발휘하였다 한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비치던 거암은 후세 고려시대에 이르러 기어이 웅대한 미륵보살 입불로 조각되었으며, 키는 55척, 둘레는 16척이다. 흔히 미륵불이라 하면 논산의 은진(恩津)미륵을 연상하나 이 미륵은 하나의 대암으로 이룩된데 비하여 은진 미륵은 약간 키가 크기는 하나, 3개의 석재로 조형되어, 조각 미술면에서 보더라도 앞서 간다. 백제 말국의 설움이 여기에도 미치는데 대조사의 미륵은 오로지 묵묵 부동으로 동녘을 바라보며 그 옛날 사라진 황금새가 다시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미륵보살은 고려시대 충남 지방을 중심으로 유행된 거대한 석조미륵불 가운데 하나로 같은 계열로는 은진 관촉사 석불과 연산 송불암 석불등을 들 수 있고, 차이는 있지만 개태사지 석불입상도 고려시대 제작된 거상군(巨像群)의 하나에 속한다. 대조사 석불은 관촉사 석불과 쌍벽을 이루는 거대한 석상이지만 석불몸체는 천연 암석을 이용하여 조각하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보관을 깎아 앉었는데 네 귀에는 방울을 달았다. 이러한 큰 불상이 이 지방을 중심으로 군집되어 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당시의 미륵 신앙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023
성흥산성(
聖興山城)
Seongheung Sanseong/Fortress

 

대 지 위 치 ;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장암면 지토리
지 역 지 구 ; 자연녹지지역
규         
 모 ; 51,398㎡
주 요 용 도 ; 성지(성곽)
문화재구분 ; 사적 제4호/1963.1.21.
준 공 년 도 ; 501년(백제 동성왕21년)

 부여에서 백제대교를 지나 서천 방면으로 가자면 임천면이 나온다. 그곳에 성흥산과 성흥산성이 있는데, 왕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수호할 목적으로 백제 23대 동성왕 21년(501년)에 축조한 중요한 산성으로 당시 에는 가림성이라 하였다. 이 산성에서 보면 부여는 물론 멀리 논산, 강경을 비롯한 금강 하류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흥산성 아래에는 대조사라는 사찰이 있고 그 절에는 보물 제217호인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성흥산성은 본래 가림성(加林城)으로서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금강하류의 요새지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옛 지명과 축성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성흥산성이 위치한 부여군 임천면은 백제시대에는 가림군이었기 때문에 일명 가림성이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동성왕 23년(서기 501년)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백가는 병이라 핑계하고 나아가 지키고자 하지 않으므로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11월이었는데도 폭설이 내려 환궁이 어렵게 되자 마포촌(馬浦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에 백가는 왕을 시해코자 도모하였다. 왕은 백가에게 화를 입고 그해 12월에 돌아가므로 동성왕이라 시호하였다. 그 뒤를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자 백가가 가림성에 웅거하며 모반하므로 왕은 병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한솔, 해명에게 명하여 토벌하니 백가가 나와 항복하므로 왕은 이를 참형하여 백강(백마강)에 던져 버렸다]는 것인데 산성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성흥산성은 테뫼식 산성으로 머리띠를 두르듯 산봉을 중심으로 산정 외곽부를 돌로 쌓았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성의 외면만 돌로 쌓고 안쪽은 호를 파서 그 흙으로 석축에 경사지게 붙여서 안벽으로 하였는데 지형이 매우 험준하고 성벽이 견고하다. 성의 둘레는 800m에 이르고 성내의 면적은 15,548평에 달하는 퇴뫼식 산성 가운데 최대급에 속하는 전략적 요새이다. 성벽의 높이는 3~4m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가장 잘 보존된 남서쪽 성벽보다 약 1.5m정도 앞으로 폭을 넓혀 내쌓서 기초를 만들었고 성벽을 지그재그 식으로 축성하였다. 이 산성은 백제산성의 한 유형을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사적 제 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성내에는 3개소의 샘이 있고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이외에도 초석 등이 흩어져 있다.
 성내 남쪽 느티나무 아래에는 4m의 폭을 가진 남문지가 있어 초석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서문지와 북문지도 있다. 남문지 바로 앞에는 돌로 쌓았던 보루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이 석재를 빼어다가 제방을 쌓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에 현재는 토성처럼 되어 있다. 주서(周書)에 '성 내외에는 서민이 살았고, 남쪽은 작은 성이 나뉘어 예속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같다. 성흥산성 남쪽 구교리에는 관동산성이 있고, 토산성에도 토축된 보루가 있어 모자산성으로 부속된 관계임을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큰 성 주위에는 작은 토성이 딸려 있고 정(亭)자 붙은 소지명(小地名)이 있는데 이는 군대의 주둔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024
정계채 가옥(鄭啓采 家屋)

Jeonggyechae Residenc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신기정로 94번길 17-8 (군수리 463-2)
구         조 : 가구식 목조 위 초가지붕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93호
준 공 년 도 ; 18세기 말(이조 후기), 헛간채;1938년

 부여읍에서 서측으로 백마강이 굽이치며 서해로 나가는 평야에 있는 군수들 마을 주변에는 대부분이 구릉이 없는 평지로, 근래에 부여대교가 세워지고 마을 앞으로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서서히 변화 하고있다. 강변 마을 중심부에 정남향으로 배치된 이 가옥은 안채와 헛간채, 광채가 각각 별도로 배치된 3동으로 시멘트로 만든 동측과 북측의 담은 직선으로 되어 있으나 서측은 골목길을 따라 곡선으로 둘러져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초가집이다. 초가집에 추녀끝에 사래를 달아 추녀를 들어올리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닌데 이 가옥의 안채에 이러한 기법이 보이고 있어 특이하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가운데 안방을 두고 서측에 사랑방, 동측에 부엌을 배치하였다. 안방과 사랑방의 앞뒤로는 퇴마루를 두고 있는데 사랑방이 뒤로 커지는 바람에 사랑방 후면의 퇴마루는 폭이 아주 좁아졌다. 안방과 부엌 사이에는 반침을 두고, 안방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단은 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석 2벌대로 쌓고 덤벙주초로 초석을 놓은 다음 방주로 기둥을 삼았다. 다만 동측의 부엌에 사용한 기둥은 원주이다. 기둥머리에서는 납도리와 퇴량을 十자로 사개맞춤을 하고 보아지는 끼우지 않았다. 평면이나, 구조적으로 볼 때 부엌은 나중에 증축하면서 달아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안채를 처음 지을 때는 사랑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처음부터 부엌을 둔 건물로 지었다면 재료나 구조적으로 동일한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야함에도 이 안채에서는 서로 다른 기법이 쓰여지고 있다. 정면과 측면의 창호는 띠살문으로 하고 부엌에는 장판문을 달았다. 특히 문설주는 연귀로 짜 맞추고 안방문의 하단에는 머름을 설치하여 초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사랑방 문에는 머름이 없다. 이 안채는 이러한 구조적 특징으로 보아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의 서측 약간 뒤로 정면3칸, 측면 1칸의 헛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헛간채 역시 초가집이고 추녀를 들어올려 곡선을 주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최근에 많이 보수하였다. 기단은 안채와 마찬가지로 대충 다듬어 만든 화강석으로 2벌대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세웠다. 기둥 상부에서 납도리와 보를 '十'자로 사개맞춤을 한 다음 서까래를 올렸다. 창호는 정면에만 두었는데 한쪽은 띠살문이고, 다른 한쪽에는 장판문을 달았다. 대문 입구에 외양간과 창고로 사용하는 'ㄱ'자 평면의 광채가 배치되어 있다. 이 광채 역시 일제때 증축한 것이며 1995년 크게 보수하였다. 조선 중기이후 건축에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지면서 차츰 주택건축에도 이러한 장식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초석을 잘 다듬어 쓴다던가, 기둥에 쇠시리를 새기고, 창호 주변 문설주 등에 여러 가지 문양과 장식조각이 들어가는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초가의 경우 장식은 잘 하지 않고 있으나 정계채 가옥에서는 특이하게도 이러한 조선후기의 장식적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25
장하리 3층석탑(長蝦里 三層石塔)
Janghari 3rd floors Stone Pagoda

 

대 지 위 치 ;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536
주 요 용 도 ; 석탑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문화재구분 ; 국보 제184호/1963.1.21.

 백제의 옛 땅이었던 충청·전라도에는 부여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 몇 개 전하고 있는 탑 중 하나이다. 땅 위에 자연석에 가까운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로 너비를 좁히면서 3단의 기단을 만들었다. 탑신(塔身)은 네 귀퉁이에 위로 오를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기둥 모양을 새겼고, 그 사이에 긴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였다. 3층에서 주목되는 점은 1, 2층과는 달리 한 개의 돌로 몸돌을 이루었고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두는 대신 북측에 세로로 긴 감실(龕室) 모양이 있는데, 이 감실은 목탑에 많이 나타나던 것으로 불상을 모시는 방을 의미한다. 석탑에서는 대부분 이를 형상화하는데 그치고 그 모양만을 새기는 정도이다.
 부여읍에서 강경으로 향하는 길섭 아늑한 배산 평지에 있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전체적으로 탑신의 몸돌이 높고 지붕돌은 지나치게 넓어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였다고는 하지만 탑전체의 균형미나 조형감각 등 수법에서 훨씬 떨어지는 작품이다. 1931년에 탑신 1층의 몸돌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1962년 해체 수리시에는 2층에서 지름 7㎝, 깊이 12㎝로 사리를 두는 공간이 둥근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41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모두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026
석성 향교(石城 鄕校)
Seokseong Hyanggyo/Study Room


 

대 지 위 치 ; 부여군 석성면 석성리 646-2
규        
  모 ; 3,260㎡
주 요 용 도 ; 향교
준 공 년 도 ; 1623년(인조 1년) 중건, 1692년(숙종 18년) 중수
문화재구분 ; 충남기념물 제126호/1997.12.23.

 '동국여지승람'에 현의 북쪽 1리에 향교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있었음을 알 수는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처음 세운 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 1년(1623년)에 현감 윤겸선의 주관으로 다시 세웠고, 1692년 현감 조신명이 중수하였다. 전체 배치는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을 앞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정남향 배치를 하고 있다. 안쪽에는 공자와 제자들,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외의 건물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인 동재를 비롯하여 내삼문, 외삼문, 수직사 등이 있다.

 

027
석성 동헌(石城 東軒)
Old Seokseong Government Office


 

대 지 위 치 ; 부여군 석성면 석성리 763-1
규        
  모 ; 3,260㎡
주 요 용 도 ; 관아건축
준 공 년 도 ; 1628년(인조 6년)
문화재구분 ; 충남유형문화재 제124호/1987.8.3.

 동헌은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의 수령이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 공적일 일을 하던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인조 6년(1628년)에 세워졌으며, 후에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성은 원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는데 고려 초에 석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태종 15년(1415년)에 현(縣)이 설치되고 후에 군으로 되었으며, 1914년 행정지역 개편으로 면이 되었다.
 
이 건물의 상량문(上樑文)에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세재무진3월24일(歲在戊辰三月二十四日) 신시(申時) 입주상량(立柱上樑) 좌진향(坐辰向)'이라고 씌어 있어 인조(仁祖) 6년(1628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동편(東便)과 서편(西便)의 망와(望瓦)에는 강희(康熙) 51년(1712년), 건륭(乾隆) 2년(1737년)의 명문(銘文)이 보인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연석(自然石) 주초석(柱礎石)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5량(五樑)집 구조다. 한 때 석성면사무소로 사용되던 한식 건물로 주변에 관아건물이 많이 있었으나, 국도와 연결되는 십자거리로 면사무소도 이전하고 현재는 이 건물과 공적비만 남아있다.

 

028
정암리 기와가마터(亭岩里 瓦窯址)
Jeongamri Rooftile Kiln Site



대 지 위 치 ;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43-1
준 공 년 도 ; 삼국시대,백제
발  굴 년 도 ; 고려시대
 

 부여읍내에서 장암, 세도로 가는 하구둑에 위치한 이 가마터는 우연히 발견되었다. 1987년 7월에 내린 집중 호우로 가마의 천정 일부가 무너지면서 일부 노출되어 밭 주인에 의해 신고 되어 발굴조사된 것이다. 유적이 위치한 일대는 대단위 가마터가 형성되어 있으며 현재도 밭갈이 도중 기와, 벽돌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가마는 구릉사면의 풍화암반층을 옆으로 터널식으로 파고 들어 구축한 지하식 평요로서 전체길이 440cm, 폭 172cm정도의 중형이다.
 가마는 회원, 아궁이, 연소실, 연도 등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회원(灰原)은 가마의 내부에서 꺼낸 목탄재, 제품의 폐기물이 아궁이 앞에 퇴적되어 있는 곳으로 기와편, 토기편, 붉게 탄 소토편, 점토등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연꽃무늬 수막새, 암·수기와, 무문전돌, 토기벼루, 토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아궁이는 지름이 각각 85cm, 76cm의 종타원형상으로 풍화암반층이 강한 불길로 돌처럼 견고하게 되어 있다. 연소실은 지름 165cm의 반원형상으로 땔감을 쌓아 태우는 곳이다. 소성실은 207×172m의 장방형으로 바닥은 약간 경사지고 있으나 평평하여 가마의 형태상 평요로 분류되고 있다. 연도는 배연구로서 소성실 뒷벽바닥 양측면에 폭 24cm, 27cm, 높이 26cm, 28cm 크기로 설치되었다. 두 곳의 연도는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의 높은 단과 함께 강한 화력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대부분 회원내에서 수습된 것으로 특히 7점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백제의 대표적인 절터인 군수리사지와 동남리사지에서 출토된 것과 같아 정암리 기와가마터가 이 두 절에 기와를 공급했던 관요였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이 가마는 기와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토기와 벼루 등이 함께 출토되어 기와·토기를 함께 번요한 겸용 가마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암리 일대는 양질의 점토, 풍부한 물, 연료채취의 용이함, 가마를 쉽게 구축할 수 있는 풍화암반층의 구릉사면, 수요처와의 근거리 등 가마터 형성에 필요한 제반 조건이 갖추어진 곳으로 여기에서 확인된 수십기의 가마터가 계속해서 조사 연구되면 기와 생산규모, 제작기법, 유통구조 등이 보다 정확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029
임천 향교(林川 鄕校)
Imcheon Hyanggyo/Study Room

 

대 지 위 치 ;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213
규        
  모 ; 2,929㎡
주 요 용 도 ; 향교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기념물 제127호/1997.12.23.

원래 임천면 구교리에 건립한 것을 1688년(숙종 14)에 군수 정석징(鄭錫徵)이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보수하였으며, 임천문묘중수기에 따르면 1926년 군수 이만용이 중수하였다. 중수기에는 “...임천은 옛날에 군이었다가 부여의 속군이 되었는데, 막중한 교궁(校宮)이 썩고 새어도 재력이 모자라 뜻이 있어도 중수하지 못하다가 신득선(辛得善)이 만금의 돈을 내고 향교 재산 2,000금을 모아 중수하였다. ....직원 유성열(柳星烈) 또한 힙을 합하여 주선한 자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후 국가의 지원을 받아 1964년, 1983년, 1986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이 사당에는 모두 23위(位)를 배향하며, 건물은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 동재(東齋)· 서재· 수선재· 수복실이 일직선 상에 배치되어 있다.

 

030
칠산서원(
七山書院)
Chilsan Seowon
/Shrine

 

대 지 위 치 ;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384
규         모 ;
사당/정면 3칸 측면 3칸, 강당/정면 4칸 측면 1칸
                   
장판각/정면 3칸 측면 2칸, 내삼문/정면 3칸 측면 1칸 
구         조
; 목구조
분         류 ; 서원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문화재자료 제102호/1984.5.17.

 시남 유 계(市南 兪 棨/1607-1664)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 계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예에 관해 정통한 학자로 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이며, 특히 예학(禮學)과 사학(私學)에 정통한 학자이다. 충청도 유림의 오현 중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사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칠산서원은 숙종(肅宗)
13년(1687년)에 세워 숙종 23년(1697년)에 임금으로부터 ‘칠산(七山)’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후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7년에 복원하였다. 서원 건물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과 강학(講學)의 공간인 강당(講堂), 장판각(藏板閣)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안에는 유계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적을 보관하는 장판각에는 저서인 '가례원류'의 책판과 '시남집'의 목판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