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부여-03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기행'/엄은화(1999/중도일보 기자),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백제역사유적 자료실

 

031
홍산 향교(鴻山 鄕校)
Hongsan Hyanggyo/Study Room


 

대 지 위 치 ;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233
규        
  모 ; 1,861㎡
주 요 용 도 ; 향교
준 공 년 도 ; 1610년/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기념물 제128호/1997.12.23.

 2009년 개통한 공주 서천간 고속국도의 서부여(홍산)톨게이트를 나와 보령쪽으로 향해 1Km 남짓 달리다가, 오른편 낮은 구릉을 향해있는 펫말을 따라 마을로 향해보면 향교가 있을 만한 장소라는 느낌이 우선 들어온다. 즉 ‘향교골’ 뒤쪽 구릉 위에 있다. 원래 홍산은 조선시대에는 독자적인 행정구역이었다. 이 향교는 정확한 창건 기록은 없으나 구전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이라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홍산현 ‘학교조(學校條)’에는 당시 홍산현의 북쪽 3리에 향교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임진왜란 때 관계문서들이 모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륜당에 걸린 오래된 현판의 기록으로 향교의 연혁을 짐작 할 수 있다. <부여향교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591년 관찰사 이성중이 중건하고, 1597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 이덕기가 복구하였다. 1643년 부여지방의 유림 홍처윤이 향교의 위치가 너무 높아 불편하다 하여 평지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1778년 유림 홍문호가 대성전과 외삼문을 중수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8·15광복 이후에는 1951년 대성전을 중수하고 1982년 명륜당(앞 5칸, 옆2칸-홑처마, 맞배지붕)을 중수하였다. 현재는 대성전과 명륜당, 외삼문, 내삼문, 수직사가 남아 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전면에 두고 대성전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식 구조이다. 외삼문 주위로 담장이 없고 외삼문과 명륜당 사이에 우물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으로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 성현 9인과 국내의 18현을 배향하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032
별신당(別神堂)
Byeolsindang/Shrine


 

대 지 위 치 ;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143
규         모 ; 정면 3칸 측면 1칸
지 붕 구 조 ; 박공지붕
주 요 용 도 ; 사당
준 공 년 도 ; 1991년
문화재구분 ;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1966.2.15

 금강의 본류에서 부여와 공주사이를 백마강이라고 불리우고, 부여에서 은산면 으로 갈라져있는 지류는 은산천이라고 불리운다. 이 은산천이 읍내를 가로지르는데,  이 뚝길을 따라가다 보면 읍내쪽의 작은 산등성이에 이 별신당이 전수회관과 놀이마당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1966.2.15.지정)인 '은산 별신제'가 펼쳐지는 자리이다.   
 이 별신재는 오랜 옛날 은산 지방에 갑자기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 갔는데, 이곳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사비성과 백제 부흥군이 웅거하던 임존성과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다. 전염병에 대해서 뾰쪽한 대책이 없이 시일만 흘러가고 사람은 더 많이 죽어 가던 어느 날, 이 고을에 사는 한 노인의 꿈속에서 금빛이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를 쓴 장군이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 장군은 "나는 백제를 지키던 장군이고, 이곳은 우리가 나라의 광복을 위해서 싸우다가 죽은 곳이다. 이곳에는 내 부하였던 애국 장병들의 원혼이 흩어져 있는 곳이니 유골을 수습하여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달라. 그러면, 그 보답으로 내가 염병을 없애 주겠다"고 말하며, 부하들의 죽음이 묻힌 곳들을 알려주면서 3년마다 한번씩 제사를 지내 주도록 부탁한 뒤 어디론 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노인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유골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더니 그 뒤부터는 그 전염병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1965년부터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은산 별신제는 매년 음력 윤2월 제사를 지내다가 지금은 격년제로
월동한 뱀이 밖으로 나오기전 좋은날을 택일 하여 모시며 옛날에는 15일 동안 근래에는 8일정도 100여명이 참가한다. 우선 제사 준비 임원(몸과 마음이 깨끗하여 부정이 없는 사람)과 화주(제물준비자)를 선출하면서 8일간의 별신제가 시작한다.
 본래 별신제(別神祭)란 본래 전국 각지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토속신에 대한 제사를 말하지만, 은산 별신제는 이러한 토속신앙 외에 백제의 부흥운동의 좌절을 상징하는 군대의식이 가미된 장군제적 성격을 가진 점이 특색으로
 백제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마을의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는 향토축제로 알려져 있다.

 

033
충덕사(忠德祠)
Chungdeoksa/Shrine


 

대 지 위 치 ; 부여군 규암면 석우리
규         모 ; 정면 3칸 측면 1칸
지 붕 구 조 ; 팔작지붕
주 요 용 도 ; 사당
준 공 년 도 ; 1986년

 조선 후기의 문신 김우항(金宇杭)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으로 1713년(숙종 39년)에 우의정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김우항(金宇杭, 1649-1723)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4일에 봉향하고 있다. 본래 정면 1칸, 측면 1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작은 건물로 현재 위치에서 약 50m 떨어진 야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86년 현재 위치인 반산 저수지 근처로 옮겨 신축하였다. 입구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삼문형 외삼문(外三門)이 있고, 이 문으로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나타난다. 측면 2칸을 모두 통간(通間)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안치하였다. 구조는 기단 위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공포(栱包)는 무출목 단익공 계통으로 꾸몄다. 무고주 5량(無高柱五樑) 집으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입구에 관리하는 개인주택의 앞마당을 통하여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034
백제 왕궁(白濟 王宮址)
Baekje Palace Site

 

대 지 위 치 ;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외
규         모 ; 2,102㎡
준 공 년 도 ; 백제시대
문화재구분 ;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43호/1983.9.29.

 부여의 지세는 백마강이 동북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들어오다가 부여 중심부를 감싸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동쪽을 향해 흐르는데 그 모양은 마치 반월과 같은 형세여서 부여의 도성을 일명 반월성이라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지세의 이점을 한껏 이용하여 국도를 정한 백제는 도성 방비를 목적으로 나성을 구축하였는데 그 주축은 부소산성에 두고 있는 것이다. 부소산성은 도성과 궁성 방어의 주된 목적으로 이룩된 산성으로서 그 남록은 평탄지를 이루고 있다. 부소산을 진산으로 남록 중심에 전개된 대지는 그 면적이 약 2만평에 달하는 바, 동서쪽에는 각각 낮은 구릉이 부소산과 연결되어 발달하였으므로 자연적으로 이 대지를 포용하였다. 이러한 점에 연유되어서인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이곳을 관아지(官衙址)로 채택하였다. 특히 이들 관아 건물에 모두 백제 시대의 초석과 판석을 사용하고 있는 사실이다. 관아 건물에 전용된 석재 또한 규모가 크고 치석 수법도 정교하여 일반 석재와는 구별되고 있다. 이 점을 미루어 보면 조선 시대까지 이 곳에 산재하였을 석재를 이용하여 관아 건물을 지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멀리서 가져 온 것으로는 그 수량이나 중량으로 미루어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현재도 만가에는 100여개 이상의 석재가 남아 있고 부지내에서는 당대의 와당을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 일대가 백제 시대의 왕궁지로 추정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백제 왕궁지에 대해서는 그 범위를 부여 박물관 부지와 인접 지역 일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시 되고 있는 것이다. 부여 박물관 부지 내에 있었던 백제시대 석조(보물 194호)에는 당나라 소정방의 기공 비문이 일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석조는 궁실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박물관 앞에서 도로 포장작업 중에 발견된 석조나 이 곳에서 건축 기초공사 중 발견된 배수구 등의 유구는 백제시대 왕궁지와의 관계를 예상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들이다.
 또한 유인원 기공비가 삼충사 후록에 세워졌던 배경도 왕궁지와 관계가 있을 것이며, 부소산 암록(부여여고 후정)에 있는 8각정(八角井)이 궁정(宮井)으로 전하는 것도 왕궁지 위치와 필연적인 관계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부여 양조장 앞을 통과하여 정림사지에 이르는 도로는 부여 시가지 도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로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도로가 왕궁지에서 정림사에 이르는 당대의 도로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듯 석목리에서 부여에 진입하는 중심가도를 포장할 때에 두 길이 서로 만나는 저점에서 거대한 방형 초석 4개가 출토됨으로써 이 곳이 왕궁지로 통하는 문지이거나 궁궐의 이루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따라서 부소산성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 일대를 왕궁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이다. 공주지역의 백제 왕궁지도 공산성을 뒤에 두고 그 남록에 궁궐을 경영하고 시가 중심에 대통사지를 배치한 도성 경영 방법과 일치되는 점도 백제 왕궁지 탐색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1982-83년 2차에 걸쳐 충남대학교 박물관 유적조사단이 박물관 입구를 발굴한 바 백제시대의 유물과 왕궁의 궁원에 시설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되었다.

 

035
흥학당(興學堂)
Heunghakdang/Study Room

 

대 지 위 치 ;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681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구          분 ; 서원
건    축   주; 풍양조씨 종중
문화재구분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1987.8.3.

 부여읍내에서 부여대교를 지나 강경으로 향하는 금강 하구뚝에 있는 서당으로, 서당 안에 걸려 있는 ‘흥학당기(興學堂記)’에 의하면 당시 장하리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경기도 양주의 옛지명을 일컫는 풍양조씨(豊壤 趙氏)문중이 학문 강론을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조선시대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지낸 난재(蘭齋) 조태징(趙泰徵)을 배향하기 위해 1770년(영조 46) 건립된 남산사(南山祠)의 부속건물이다. ㄷ자집 모양의 평면구조로, 중앙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5칸의 방이 연결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대청 뒤쪽에는 머름을 댄 판문(板門)이 나 있으며, 전체적으로 소담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기에 지나면서 한번 들루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