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금산-00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1
보석사 대웅전
(寶石寺
大雄殿)
Daeungjeon of Boseoksa/Temple


대 지 위 치 ;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11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창건-통일신라 중건-조선 후기
문화재지정 ; 충남 유형문화제 제143호/1995.11.12  

 읍내에서 남쪽으로 약 9km 떨어진 진악산(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보석사 는 신라 헌강왕 12년, 정강왕 원년(886년)에 조구대사(祖丘大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조구대사는 인근 제원면에 있는 신안사를 창건했다는 인물로 이 지방 불사 창건에 많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근근히 유지되어 오다가 조선말 고종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의 앞산에서 금을 캐 불상을 만들었다는 유래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배치는 급한 구릉을 배경으로 '口'자형이긴 하지만 중정에 흔히 세워두는 불탑을 생략하여 중정이 횡으로 긴 장방형이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 개방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아두었다. 기둥은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주를 쓰고 공포는 내외 3출목 5포작의 다포식으로 짜 올렸다. 불당 내부에는 중심에서 뒤로 조금 물러나 불단을 설치하고 석가모니, 관세음, 대세지보살 3기의 불상을 안치했다. 불상 상부에는 간단한 닷집을 천정에 달아 두었다.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을 설치하고, 실0내 바닥은 우물마루로 짰다. 건물 내 외부에는 모루단청을 해 두었다. 대웅전의 외형은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그러나 작은 규모이면서 다포식으로 공포를 짜고, 선모루단청을 해두어 경내에서 중심건물의 품격을 지니도록 하여 비교적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적 특징과 기법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지난 날 전라북도 불교의 이사중추 기관이었고 현재는 충남 교구 산하로 되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 앞산 중허리의 암석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하였다는 데서 이름지어졌다. 사찰에 들면, 울창한 숲과 암석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있어서, 속세를 떠난 듯하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승장 영규대사(義僧將 靈圭大師)가 머물렀던의선각, 산신각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절경의 12폭포가 있다. 특히 높이 40m, 둘레가 10.4m나 되는 1,1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 가 있어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 주며, 2-300m 정도의 전나무길이 있어 호젓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002
칠백의총(
七百義塚)
Chilbaekeichong/Shrine

  

대 지 위 치 ; 금산읍 금성면 의총리 52-1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규          모 ;
135,693㎡    
주 요 용 도 ; 묘역
준 공 년 도 ; 1647년(인조 25년)
문화재지정 ; 사적 제105호/1963.1.21.  

 임진왜란(1592년)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여 명의 의병들을 위한 묘소과 사당이다. 이를 이끌었던 의병장  조 헌(1544년-1592년)은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 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칠백의총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조선 선조 36년(1603년)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년)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003
칠백의사 순의비각, 기념관(七百義士 殉義碑閣, 記念館)
Chilbaekeisa Memorial Tower & Hall

대 지 위 치 ; 금산읍 금성면 의총리 52-1
규         모 ; 1기
구         조 ; 철근콘크리트 라멘조
문화재지정 ; 사적 제105호/1963.1.21. 
준 공 연 도 ; 1970년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의병들을 위한  순의비로, 일본강점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고 있다 복원하였다. 비각에는 중봉 조 헌 선생 일군 순의비의 파비가 보존되어 있는데, 임진왜란때 일어난 의병들이 왜병으로부터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행적을 윤근수가 글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써서 1603년 4월에 건립하였따. 1963년도에 이르러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0년에 기념관과 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참고문헌;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4
청풍사(
淸風祠)
Cheongpungsa/Shrine

 
  

대 지 위 치 ;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246-1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구          조 ; 목조
소          유 ; 해평길씨 종중
준 공 년 도 ; 1761년(영조 37년)
문화재지정 ; 문화재자료 제16호/1984.5.17.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분인 야은 길 재(冶隱 吉 再)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1761년(영조 37년) 금산군수로 부임한 민백흥(閔百興)이 유림의 요청에 의하여 이 사당을 건축하면서, 이 마을 이름도 선생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는 충절을 길이 우러러 사모하기 위하여 ‘불이(不二)’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야은 길재는 1353년(공민왕 2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으나, 부친 원진(元
進)이 금주지사(錦州知事)로 부임하였을 때 선생도 함께 와서 신씨의 가문에 장가들어 이곳에 살게 되었다. 고려가 망한 후 조선의 태자 방원(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사우 앞에 있는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는 선생의 충절과 평생동안에 한 일을 전해주고 있으며 ‘선생의 충절이 황하(黃河)의 급류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서있는 지주(砥柱)와 같다’하여 세운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가 있다. 이 글씨는 중국에서 온 사신이 직접썼고 일부는 한석봉이 썼다고도 전해져 내려오는데, 오는 도중에 풍자의 글자 획을 하나 잊어 버렸다는 야사가 있으며, 흔히 충청남도를 청풍명월의 고장이라 일컫는데 이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금산군 문화관광 포탈

 

005
구암사(
龜巖祠)
Guamsa/Shrine

 

대 지 위 치 ;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 422
규          모 ; 정면 3칸, 측면 1칸
수          량 ; 1동   
구          조 ; 목조
소          유 ; 남원양씨 종중/양희찬
준 공 년 도 ; 1922년
문화재지정 ; 문화재자료 제301호/1988.8.30.  

 남원 양씨(南原 梁氏) 문양공(文襄公) 눌재 양성지(訥齋 梁誠之)선생을 배향한 사우로서, 평촌리의 주봉인 귀래봉(歸來峰) 아래 도로변에 있다. 눌재 선생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5대 40여 년간에 걸쳐 벼슬하며 집현전 학사,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맡아 빛나는 공적과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후로도 선생의 6세손인 천음 응해(天陰 應海)가 이곳에 정착하여, 구암사숙(龜巖私塾)을 열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33년 이 사숙의 터에 눌재 선생의 높은 학문을 우러러 이를 따르던 유림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1922년도 가을에 구암사를 건립하여 매년 두차례씩봄,가을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묘정(廟廷)에는 선생의 행적과 공훈을 새긴 눌재 양선생묘비(訥齋 梁先生廟碑)가 건립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지금도 남아있다

참고문헌; 금산군 문화관광 포탈

 

006
온양이씨 어필각(溫陽李氏 御筆閣)

Onyang Leessi Eopilgak

 
 

대 지 위 치 ; 금산군 금성면 하신리 291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수          량 ; 1동   
구          조 ; 목조
준 공 년 도 ; 이조시대
문화재지정 ; 문화재자료 제22호/1984.5.17. 

 2006년도에 개통된 4차선의 국도 때문에, 지금은 이용이 뜸한 옛도로의 대전 금산간에서 머들령을 넘어서 추부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원래 온양이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임금의 글씨를 전각하여 보관하던 곳으로 조선 후기 이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효행(孝行)을 한 오세삼효(五世三孝)가 있었는데, 5대에 걸친 이 삼효는 이태귀(李泰貴)와 그의 증손 이원배, 이흥엽으로 모두 효행이 뛰어나 순종 황제에까지 알려졌다. 이에 이지역 유림(儒林)들의 천장(薦狀)으로 1925년에 순종 황제가 오세삼효의 덕(德)을 칭찬한 ‘온양이씨계효지비(溫陽李氏繼孝之碑)’라는 여덟 자의 어필(御筆)을 하사하였으며, 3효문의 정각을 세웠을 때 대한제국의 의친왕(義親王:1877-1955)은 ‘온양이씨 삼효문(三孝門)’이라는 친필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방의 유림과 온양이씨 후손들이 어필비(御筆碑)를 세우고 어필각을 지었으며, 또한 이원배가 지방 유림과 함께 순종께 은혜의 보답으로 전각을 봉건키로 했다는 뜻을 전해 듣고 ‘숭봉전’이라는 친필 액자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007
용강서원(龍江書院)
Yonggangseowon/Shrine

 

대 지 위 치 ;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342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서원
준 공 년 도 ; 1910년
문화재지정 ; 문화재자료 제19호/1984.5.17.  

 1976년(숙종 42년)에 금강 상류인 용강가에 창건된 서원으로, 당시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금산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동춘 송준길, 시남 유 계(市南 兪 啓), 우암 송시열 세분만 배향하였고, 18세기 말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발전하다가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웠으나, 1910년 지역 유림들이 헐린 목재를 이용하여 이 서당을 복원하여, 현재 금산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서원건물로 남게되었다.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 유림들의 계를 통한 회합 및 자제교육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008
신안사(身安寺)
Shinansa/Temple

 

대 지 위 치 ; 금산군 제원면 신안리 52, 54
규          모 ; 정면 5칸, 측면 3칸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창건-583년/ 신라 진평왕 5년, 중건-조선후기
문화재지정 ; 대광전/충남 유형문화제 제4호, 
                   극락전/ 충남 유형문화재 제177호  

 신안리 동북쪽에 있는 해발 677m의 신음산 국사봉에서 내려온 지맥의 산록에 있는 이 절은 신라26대 진평왕 5년인 583년 무염 무량선사가 창건했다. 신안사라는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927년-935년)이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영국사에서 수학할 때 이절에 가끔 들러 유숙하였는데 천태산 국사봉을 배경으로 주위환경이 산자수명하고 정적한 유수경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하여 신안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가람고'에는 각각 현존 사찰로 분류 되어있어 16세기 무렵부터 18세기까지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절에는 대광전, 진향각, 극락전, 요묵당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광전(충남유형문화재 제4호) 과 극락전(충남유형문화재 제177호)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불상은 10기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병화로 소실되어 태고사 등으로 5기를 이봉하고 현재 5기만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단정 우아한 모습은 참배자에게 불심을 일으키게 하는 이조미술의 걸작품이라 한다. 이 절이 흥할 때에는 반승 3,000여명이 수학하였다 하며 불경, 불기 등 여러 가지 비품이 많았는데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어 찾을 길이 없고 산곡의 명미함과 절앞의 심연 단폭과 20리에 뻗친 계곡의 절정만이 이곳의 옛 영화를 증언하는 듯 조용히 의연한 금도를 지키고 있다. 결국 지금의 가람 형태는 진향각, 요묵당 등이 있던 과거의 규모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극락당 앞마당에는 칠층석탑 1기와 부도 2기가 남아있다.
 극락전은 조선 후기의 건물로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모시고, 그 좌우에 관음지장보살을 모신 건물이다. 건축양식은 자연주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배흘림 맞배지붕으로 다포계양식의 내4출목의 포작으로 되어있다. 정면의 중간칸에는 빗살창을 하고, 좌 우칸에는 정자살창을 하였다. 건물 외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뒷면 중앙에 내고주를 세워 여기에 후불벽화 불단을 조성하였다. 탱화는 1935년에 조성된 것이다.
 대광전은 석가모니께서 설법한 진리를 형상화한 '비로나자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여래'를 모시고 있다. 건물은 조선 후기 건물로 다초식 맞배지붕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그 중 3칸에는 후불벽화불단을 조성하였고, 외부에도 쪽마루를 달았다. 현제 일부가 보수되어 주변의 정리된 건물들과 함께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신안사는 입구의 중심선을 축으로 좌우대칭으로 쌓여있는 진입부근의 석축 부터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건물이나 주변환경이 아직은 때뭍지 않은 청소함을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009
금산향교(錦山鄕校)

Geumsan
Hyanggyo/Shrine

 

대 지 위 치 ; 금산군 금산읍 상리 산4
주 요 용 도 ; 서원
구          조 ; 목조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지정 ; 기념물 제121호/1984.5.17.  

 조선시대의 관립 교육기관으로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는 곳으로 각 고을마다 건립되었다. 금산향교는 원래 조선 초기에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다시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1684년(숙종 10년)에 향교를 현 위치로 옮겨 짓고 그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철(先哲)을,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의 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로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배향된 인물의 배향 순서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명륜당(明倫堂)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이고, 동재(東齋)와 서재(書齋)는 유생들의 숙소였다. 그밖에 동재각(東齋閣)과 서재각(書齋閣),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등이 남아있다.
 특히 인근에 향교를 중심으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군민다용도회관인 '다락원'과 놀이터가 함께 인근에 조성되어 있고, 기적의 도서관 등이 건립되어 있어 현재도 문화시설로의 기능을 발휘하여 제 역할을 다해 주고 있음이 보기에 참 아름답다.

 

010
태조대왕태실(太祖大王胎室)

Placenta Chamber of King Taejo


대 지 위 치 ;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1-108
주 요 용 도 ; 태실
구          조 ; 석조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지정 ; 유형문화재 제131호  

대전 동구의 끝에 있는 만인산휴양림은 금산으로 향하는 마지막 도로인 태봉터널의 입구에 있다. 이 휴양림의 '푸른학습원' 입구에서 불과 40m거리에 놓여있어, 대전과 금산의 경계선에 거의 붙어있는 격이다. 태실은 왕이나 왕실의 자손들의 태(胎)를 묻어 놓은 석실로 여기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태를 모신 곳으로 만인산(537m) 봉우리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태봉터널 위에 조성되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고려말-조선초에 한 시인이 전국의 명산대천과 명승고적을 두루 살필 때, 만인산을 보고 산의 모양이 깊고 두터우며 굽이 굽이 겹쳐진 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고 계곡 물이 한곳에 모여든다고 찬양하였다. 왕실에서 이 소문을 듣고 지관을 보내 이곳을 샅샅히 답사하여 보니 과연 소문과 같았다. 그래서 당초 함경도 용연지역에 있는 태실을 1396년(태조 5년) 무학대사의 지시로 이곳 만인산 남쪽 금산쪽 양지바른 산허리에 태실을 만들어 안치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이 후 이산을 만인산을 태봉산이라고도 불리었다.
 1928년 조선 총독부에서 전국에 산재한 왕의 태항아리를 서울로 옮겨갈때 이 태실의 구조물은 파괴되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던 여러 석물을 모아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