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공주-00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홈사이트, 공주박물관 홈사이트,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시스템

  

001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
Gabsa in Mt.Geyryong/Temple





대 지 위 치 ;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4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창건-420년(추정) 중건-조선 중기
문화재 지정; 강당-충남 유형문화제 제 95호, 대웅전-충남 유형문화제 제105호,대적전-충남 유형문화제 제106호/1984.1.21
                   표충원-문화재자료 제 52호, 팔상전-문화재자료 제54호/1984.5.17.  

계룡산의 갑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과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무령왕 3년(503년)에 천불전을 창건하였다는 설,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고, 통일신라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철당간과 신라 말-고려 초의 것으로 보이는 부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때부터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 경내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탄 후 1604년(선조 37년) 대웅전, 1614년 강당, 1783년 표충원, 1797년 적묵당, 1826년에 대적전이 점차적으로 중건되었다. 가람 배치는 계곡을 끼고 크게 대웅전 구역, 대적전 구역, 표충원 구역으로 구분된다.
 대웅전은 높은 축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정면과 후면에만 만들어 두었으며 다포식이다. 강당은 1890년 중수 전까지만 해도 강당이 아닌 정문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조선 중기에 중건되었지만 귀솟음, 공포형식 등에서 조선 전기의 풍모가 나타나고 있다. 대적전(大寂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공포와 같은 세부기법에서 조선후기의 건축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에서는 전후의 공포 모양이 다르다. 실내는 특이하게도 정면열 두칸은 우물마루로 하고 후면열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표충원(表忠院)은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인 이 건물은 일반적으로 영당의 경우 전면열을 퇴칸으로 만드는데 비해 이 건물은 퇴칸을 두지 않았다.
679년에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대웅전은 원래는 현재 대적전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옆면이 사람인(人)자 모양으로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칸 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끝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고, 불단을 만들어 석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으며,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대적전은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석가모니·아미타불·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원래의 금당지 옆에 있던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가운데 칸은 공포가 2개이며, 양 끝칸은 1개의 공포로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보현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석가모니불 위에 천장을 한단 올림으로써 닫집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해탈문과 대웅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강당은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뒤로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의 옆선이 사람 인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기둥 위에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를 짰는데,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단청은 완전히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만 남아 있으며, 문짝은 많이 변형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절도사 홍재의가 쓴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조선시대 후기의 웅장한 건축물이다. 표충원은 영조 14년(1738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격퇴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건물 안에는 서산대사 휴정·사명대사 유정·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팔상전에는 석가모니불과 팔상탱화, 그리고 신중탱화를 모시고 있다. 건물 규모는 작지만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며 격식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002
신원사(新元寺)

Sinwonsa/Temple

대 지 위 치 ;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지 역 지 구 ; 보존
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및 사당
준 공 년 도 ; 창건-652년 중건-1876년
문화재 지정; 충남 유형문화제 제80호/1978.12.30. 오층석탑-유형문화재 제31호/1974.9.1.  

 계룡산 서측 기슭에 있는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651년)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성종때 여철(如哲)화상이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그 후 1298년(고려 충렬왕 24년)에 정암(淨庵)화상이 중건하였으나 번창하지 못하고 조선이 개국된 직후인 1394년(태조 3년)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대웅전은 조선말 고종 13년인(1876년) 보연화상(菩連和尙)이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신원사(新元寺)의 원래 이름이 귀신의 집이라는 의미로 '신원사(神院寺)'였던 것을 보면 오래 전부터 이 절이 계룡산신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화려한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기둥에는 약한 배흘림이 있다. 처마의 끝을 살짝 올려 우아한 멋을 나타내었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며, 연꽃을 조각하여 장식하였고 매우 간략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 위에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다. 천정은 우물반자와 연등천정을 혼용하였고, 각종 기법에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읽을 수 있다.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인 중악단(中嶽壇) 남쪽에 서 있는 5층 석탑이다. 현재는 4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는데 이것은 목조건축의 기둥을 모방한 것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거의 수평이다. 석탑의 서쪽에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두어 예를 갖출 때 쓰는 돌)이 마련되어 있다. 중후한 느낌을 주는 석탑으로,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75년 12월 탑의 해체·복원 공사 당시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구와 함께 개원통보, 함원통보, 황송통보, 주둥이와 손잡이가 깨어진 자기주전자,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병 등이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사진; 유병구/씨엔유건축

 

003
계룡산 중악단(鷄龍山 中嶽壇)

Geyryong Jungakdan/Shrine

대 지 위 치 ;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산8
지 역 지 구 ; 보존
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사묘재실
규          모 ; 일곽 3동
준 공 년 도 ; 조선 고종
문화재 지정; 보물 제1293호/1999.3.2. 유형문화제 제7호   

 중악단(中嶽壇)은 신원사와 인접해 있지만 신원사와는 관련이 없는 단묘(壇廟)건축이다. 조선 초기인 1394년에 건립되었으나 1651년 폐지되었다. 그 후 조선조 말 고종 때인 1879년 명성왕후의 명에 의해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계룡산의 산신을 모시는 단묘로, 조선 고종때에 묘향산을 상악(上岳). 중간지점인 계룡산을 중악. 지리산을 하악으로 삼아 세곳에 제단을 설치하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현재는 이곳 중악단만 남아 있다. 중악단의 배치는 중심축선을 따라 대문 간채, 중문 간채, 중악단 본전이 나란히 배치되고 주위를 담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사당의 공간적 엄숙함과 위계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년)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구릉지에 동북·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년)가 쓴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1.5m의 높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있게 하였다. 또한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조선시대 상악단과 하악단은 없어져서 그 유적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중악단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사진; 유병구/씨엔유건축

 

004
동학사(東鶴寺)
Donghaksa/Temple


   

대 지  위 치 ;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지 역  지 구 ; 자연보존지구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구          조 ; 목구조
준 공 년 도 ; 신라시대/7243년

 계룡산의 대전쪽인 동쪽 골짜기에 싸여 있는 천년고찰 동학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 비구니 강원(일명:승가대학)으로, 15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부처님의 일대시교 및 수행과 포교에 필요한 제반 교육을 받으며 청진하고 있는 장소이다. 신라 성덕왕 23년(724년)에 상원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던 곳에 회의화상이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이름을 청량사라 했었다. 고려 태조3년(920년)에 도선국사가 왕명을 받아 중창하였는데, 국사가 원당을 건립하고 국운을 기원했 다해서 원당이라고도 불리우다가, 그 후 영조 4년(1728년) 신천영의 병화로 사원이 전소되어 80여년 동안 빈 절터인 채로 내려오다가, 이조 순조 14년(1814)에 금봉화상이 옛 원당터에 실상암을 짓고 절 을 중건하여 절 이름을 개칭하되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 하여 '동'자를 따고 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이라 하여 '학'자를 따서 동학사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고 또 계룡산 동쪽 사찰 입구에 청학이 깃들었다는 학암(鶴岩)을 위주로 하여 동학이라는 절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고종 원년(1864년)에 만화화상이 개창하였고, 그의 제자인 경허성우스님이 고종8년(1871년)에 강의를 열었으며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 날렸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으며, 지금도 일주문 불사 및 상원암(옛 계명장사로 남매탑이 있는 곳)복원불사가 진행중이다. 현재 전각으로는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하여 조사전,육화당, 강설전, 화경헌, 엽화실, 실상료, 숙모전 등이 있다. 신내암자로는 미타암, 길상암, 관음암, 문수암, 심우정사, 상원암 등이 있다.
 동학사에는 다른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이 있는 건축물이 있다. 동학사 경내에 들어서려면 두 기둥이 우뚝한 홍삼문을 볼 수 있 는데, 이는 궁궐,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는 문으로 사찰과는 어울 리지 않는 30자 이상의 홍살문이다. 이것은 동학사가 사원이면서도 경내에 유신의 사당인 동계사, 그리고 삼은각과 숙모전이 있는 점 들과 상호 연관된 인연들이 어우러져 세워진 것이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문화재 자료 제58호인 3층석탑, 문화재자료 제57호 인 삼성각과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 등이 있다.

 

005 
남매탑-청량사지 석탑(淸凉寺址 石塔)
Sister Pagoda-Cheongryangsaji Stone Pagoda at Mt.Gyeryong

대 지  위 치 ;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규          모 ; 2기
문화재지정 ; 5층석탑-보물 제1284호, 7층석탑-보물 제1285호/1998.9.15.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중기

 계룡산 동편 중턱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른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오층석탑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길쭉한 형태이다.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다. 특이한 점은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워두었다는 것이다. 탑신의 각 층 지붕돌은 얇고 넓어서 균형과 안정감을 잃고 있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비인 오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을 딴 돌로 세운 점이 특이하며, 탑신은1층 몸돌의 한 면에 직사각형 모양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3·4층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2층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가 1층 보다 급하고, 2-7층까지 몸돌이 줄어드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아 탑 전체의 안정감과 균형을 해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이를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미륵사지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으로 이어지는 석탑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고려시대에 와서 각기 특징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사진; 유병구/씨엔유건축

 

006
송산리 고분군(
宋山里 古墳群) 과 무령왕릉(武寧王陵)
Songsanri Tombs & King Muryeong's Tomb


 

대 지  위 치 ; 공주시 금성동 산5외 21
지 역  지 구 ; 자연보존지구
규          모 ; 283,301

구          조 ; 조적조
문화재구분 ; 사적 제13호/1963.1.21.
준 공 년 도 ; 백제시대/523년

 송산리고분군은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9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 13기 이상의 분묘가 분포되어 있다. 1927년부터 발굴되어 왔으나, 1970년 6월 29일 부근배수로 공사 도중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백제 고분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그었는데, 총 7기의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이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점에 달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1-5호분은 자연할석을 이용한 횡혈식 석실분으로 벽면에는 백회를 발라 미장하였다. 천장은 돔형식의 궁륭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모두 벽돌로 무덤을 만든 전축분이다. 특히 6호분의 경우에는 4면의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전축분은 우리나라에서는 낙랑군 지역에서 몇기 보일 뿐 삼국시대에는 별로 축조되지 않는 형태이다. 그러나 중국의 남조에서는 이와 같은 전축분의 형태로 무덤이 많이 만들어졌으므로, 이 것을 통해서 백제와 중국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엿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백제유적인 송산리 고분 가운데 1,400 여년이나 된 무령왕릉이 발굴 후 25년간의 공개에도 남조류 등 미생물이 서식하고 빗물이 스며 드는 등 원형 보존을 위협함에 따라 1997년 11월 무령 왕릉 등 송산리 고분군의 원형을 후손들에게 길이 물려주기 위해 보수공사가 끝난 뒤에도 이 능을 포함, 인근 5·6호분을 영구히 폐쇄한다. 현재는 모형 전시관을 고분군 경내 지하에 원형과 똑같이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공주시 금성동 백제 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군집된 곳으 로 무령왕릉외에 7기의 무덤이 더 있다. 이 중 무령왕릉은 전축 분으로 1971년 배수로 공사 중 발견되었고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건 에 달하고 있다. 무령왕(462-523년)은 재위 기간 동안 민생을 안정시키 고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큰 업 적을 이룩하여 그의 아들 성왕 대에 백제 중흥을 열게 하였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백제문화의 높은 수준과 그 확실한 연대를 증명하 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으며, 동양 문화사에  백제문화 의 위치를 드높혔다.

 특히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를 합장한 무덤으로 동으로는 수려한 공산 성과 서로는 금강이 아늑하게 감싸돌며, 남으로는 계룡산이 버티고 선 풍치가 빼어난 곳이다. 무령왕릉(재위462-523년)은 1971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공사 중 발견
된 7호 고분으로 능의 주인이 백제 25대 무령왕으로 밝혀지었다. 평균 구조 는 장방형의 이도(고분 입구에서 사체가 안치된 방까지의 통로)와 현 실벽은 마치 수를 놓은 듯 모두 연화문이 새겨진 전(벽돌)으로 정연 히 쌍아졌고,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가 있으며, 3벽에는 주칠(주색 의 칠)과 화염문을 그린 보주형 등이 5개가 장식되었고, 그 아래에는 마치 창과 같은 모양의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잘 구워진 벽돌로 조영된 왕릉은 그 치밀함이 백제의 수준 높 은 과학과 수리학의 수준을 엿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아름다움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됐다. 비록 중국 남조의 벽돌무덤 양식을 받 아들였지만 사평일견법(四平一堅法)을 통한 치밀한 구조와 완벽한 아치형 천장은 전인미답의 백제의 독자적인 면모라는 것이다. 이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2,906점에 달해, 국립 공주박물관에 진열,전시하고 있으며, 이 중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특히 이 릉 에서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피장자와 그 구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국보급 유물로는 왕과 왕비의 금관, 왕비의 금제 경식, 왕의 금제 뒤꽂이, 왕비의 은제 팔찌, 청동신수경, 석수, 지석, 두침, 족좌 등이 있다.  
 
고분군 입구에 무령왕릉 모형관이 설치되어 왕릉내부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 백제는 문주왕(475-477년, 재위)이 475년 지금의 서울지방인 한성으로부터 천도한 이래 삼근왕 (477-479년, 재위), 동성왕(479-501년, 재위), 무령왕(501-523년, 재위)을 거쳐 성왕(523-554년, 재위)이 538년 수도를 다시 지금의 부여인 사비 로 옮길 때까지 5대 63년간 지금의 공주인 이곳 웅진에 도읍하고 있었다. 이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잡고 있는 고분들은 바로 웅진도읍 지에 재위하였던 백제의 왕들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계룡산이 눈앞에 펼쳐져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당시에 이미 사신사상에 따라 묘지를 선택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밝혀진 이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크게 석실분과 전축분의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북방 상부에 동서 1렬 로 늘어서 있는 4기의 고분과 남방 하부에 위치한 3기의 고분 중 동남쪽의 한 고분(5호분)은 현실과 현실로 들어가는 길인 연도를 네모꼴로 다듬은 돌로 축조한 석실분이고, 남방 하부의 나머지 두 고분 즉 무령왕릉과 6호분은 벽돌로 쌓은 전축분이다.

참고문헌; 백제역사유적 자료실

  

007
마곡사(麻谷寺)
Magoksa/Temple

대 지 위 치 ;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규          모 ; 1층-정면 5칸, 측면4칸
                    2층-정면3칸, 측면2칸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창건-643년(추정) 중건-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오층석탑-보물 제799호/1984.11.30.
                   심검단 및 고방-충남 유형문화제 제135호
건 립 연 대 ; 17세기경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창건하였다고 하나 명확치 않다. 그 후 847년 범일국사(梵日國師)와 877년 도선국사가 각각 중수 확장하였고, 고려에 들어와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크게 중창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내(川)를 가운데 두고 남북 구역으로 구분된다. 북쪽 구역은 대웅보전, 대광보전, 응진전, 심검당, 대향각(大香閣) 등이 있고, 남쪽 구역은 해탈문, 천왕문, 영산전, 흥성루(興聖樓), 매화당, 수선사(修禪社), 그리고 조금 떨어져 명부전과 국사당이 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51년 각순대사와 당시 공주목사가 협력하여 다시 지었다. 처음에 대장전으로 지었으나 나중에 대웅보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2층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대광보전(大光寶殿)은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처음 건립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불에 탄 후 1813년 중건하였다. 마곡사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태화산 동쪽줄기에 남향으로 있는 이 마곡사는 진입과정과는 달리 일단 사찰영역에 들어서면 평탄한 지대에 주위에는 송림이 우거지고, 서에서 동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이 내를 건너기 전에 해탈문과 천왕문이 서 있고, 좌측에는 동향에서 영산전이 있다. 정심교를 지나면 광장 북측에 5층 석탑과 대광보전이 있으며 뒤쪽으로 대웅전의 중층지붕이 나타난다. 두 개의 건물은 누각 진입시 마치 일축선상에 있는 것 처럼 보이며 심층적 시각효과를 얻고 있다. 대웅보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 일반적인 조선 중기 목조건축의 조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산전(靈山殿)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 중기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배흘림이 강한 원주를 사용하고 건물 세부기법에서 조선 중기의 건축적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5층 석탑은 고려후기 때 만든 것으로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한국의 건축(대한건축사협회/1988), 사진; 유병구/씨엔유건축

 

008
공주 공산성
(公州 公山城)
Gongju Gonsan Fortress

대 지 위 치 ; 공주시 산성동 2 외
지 역 지 구 ; 자
연녹지지역
규          모 ;
218,817㎡
성 벽 길 이 ; 2,660m(외성 제외시-2,193m)
성 벽 높 이 ; 약 2.5m, 너비 약 3.0m
준 공 년 도 ; 창건-5세기 말(삼국시대), 중건-조선 중기
문화재 지정; 사적 제12호/1963.1.21.

 백제가 475년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세운 성으로, 북쪽으로 금강이 있어 자연적 방어선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3면은 높지 않은 야산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그러니까 백제 문주왕(文周王) 1년(475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여 삼근왕(三斤王), 동성왕(東城王), 무령왕(武寧王)을 거쳐 성왕(聖王) 16년(538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북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0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전혜요새로서 동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이며, 원래 백제 때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선조와 인조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내에는 백제시대 건물터를 비롯하여 후기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건물터가 산재해 있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기와가 출토되어 백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내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임류각(臨流閣)터와 만아루(挽阿樓)터를 비롯하여 12각 건물지 등 많은 건물터와 연못터 등이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이곳을 백제 왕궁자리로 추정하기도 한다. 공산성의 동문, 서문, 남문(鎭南門)은 해방이후 복원되었지만 북문인 공북루(拱北樓)는 1603년에 옛 망북루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편 중심부에 위치하고 주변은 지대가 낮고 평지이다. 성내에서 금강과 가장 손쉽게 통할 수 있는 곳으로 비상시 외부로 탈출하는 문으로도 사용될 수가 있었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년)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 괄의 난(1623년)'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읍성이나 산성은 대부분이 남문을 크게 만드는데 공산성에서는 북문인 공북루를 가장 크게 만들었는데, 이 공북루는 공산성 내에 남아 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구조가 특이하다. 공산성의 남쪽에 있는 진남루(鎭南樓)는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처음 건립하였는데 그후 여러 차례 수축되어 오다가 1971년 해체 수리하였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009
공산성 임류각지(
公山城 臨流閣址)
Imryugakji, Gongsan
Fortress

대 지  위 치 ; 공주시 금성동
지 역  지 구 ; 자연보존지구
규          모 ; 정면 6칸 측면 7칸
구          조 ; 목구조
준 공 년 도 ; 백제시대/493년

 우리나라 정원중 문헌상 최초의 정원으로 '삼국사기'와 '동국통감'에 의하면, 물가에 세워져 강의 수경과 산야의 경관을 바라다 보면서 즐기는 유락의 기능을 겸한 정원으로 못을 파고 금수를 우리안에서 길렀다고 한다. 공산성의 산정에 위치한 광복루에서 서쪽으로 약 150m 정도 떨어진 산의 중턱 서향 사면에 위치한다. 임류각은 삼국시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후, 약 25년이 지난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493년)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1980년의 조사에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된 유지는 정비되어 있으며, 건물의 문화적, 학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래의 유지에서 약간 위쪽에 새로이 복원되어 있다. 임류각에 대한 조사 결과 초석의 배열은 남쪽열에 6매, 동쪽열에 7매를 배치하여 건물은 남변이 5칸, 동변이 6칸이지만 각각 10.4m ×10.4m의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에 사용된 초석은 총 42매였 으나 현재 남아 있는 초석은 31매이고 나머지 11매는 결실되어 있다. 초석의 기본 형태는 방형이나 2∼3매의 돌을 합하여 1개의 초석을 이루고 있으며, 고층 건물을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초석의 상면에 요철을 주어 기둥이 힘을 받고 밀착되도록 하는 소위 그랭이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기반이 약한 초석 주위에는 굴건식 원형 주공을 만들어 보조 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임류각지의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가 대부분으로, 단판 8엽의 백제 연화문 와당과 후대의 세판 연화문 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임류각지는 초석을 지상에 노출시키면서 정비가 이루어져, 임류각에 대한 복원도 이루어져 정면 6칸, 측면 7칸의 이층 형태의 누각 건물이 광복루 아래 광장에 복원되어 있다.

 

010
공산성 공북루(公山城 拱北樓)
Gongbukru, Gongsan Fortress


대 지  위 치 ; 공주시 금성동 165
지 역  지 구 ; 자연보존지구
규          모 ; 정면 5칸 측면 3칸
구          조 ; 목구조
문화재지정 ; 충남 문화재자료 제37호
지 정 일 자 ; 1976.1.8.
준 공 년 도 ; 1603년

 공산성에 설치된 문루 중 북문으로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다. 선조 36년(1603년)에 옛 망북루 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시축 후 수 차례에 걸쳐 개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나, 현존의 것은 본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 문루 건축의 대표적 예로 꼽는다. 건축의 내용은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동성의 충청도 편에 보면 1603년인 계묘년에 쌍수 산성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공북, 진남 양문을 건립한 내용을 적고 있어 현존의 공북루 건물의 축조에 대한 기사를 남기고 있다. 본래 현존 공북루의 자리는 망북루가 자리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유지는 공북루의 동쪽 성벽상에 초석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외형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망북루의 초석은 자연석으로 4매가 지표 면에 남아 있으며, 성문의 건축은 협축 형태로 조성된 석성이 절단된 후면에 이층의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면적은 남문인 진남루의 2배 가량이며 고주를 사용한 이층의 다락집 형태로 고창 읍성의 공북루와 유사한 모습이다. 각 문의 크기는 등간격이며 누의 중앙 어칸에는 출입문을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근세까지 문비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