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홍성-00

참고문헌; 대전충남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홍성군청 사이트 '

  

001
고산사 대광보전(高山寺 大光寶殿)
Daegwangbojeon of Gosansa/Temple

 

대 지 위 치 ;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 492
지 역 지 구 ; 산림보존지구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조선 초기, 개축/1626년(인조 4년)
문화재구분 ; 보물 제 399호/1963.9.22.                   

  청룡산(235m)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의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네모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중간에 기둥이 없는 것이 특색으로, 대광보전 중앙과 우측에 있는 불상은 토불이고, 우측의 석불은 입상이며, 좌대석은 팔각과 사각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큰 막돌 두벌대로 쌓고 덤벙 주초로 초석을 삼았으며,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쓰고 주심포식 공포를 짜 올렸다. 또한 절 안에 고산사 중수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창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에 청룡산에 고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초기에 이미 이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조사과정에서 암막새에 「천계6년6월(天啓六年六月)」이라는 기록이 있어 대웅전은 임진왜란 이후인 1626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후 간격이 좁은 대지에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요사를 하나씩 두고 있다. 대웅전 앞은 넓게 확보하지 못했다. 대웅전 기단에 붙여 삼층석탑을 옹색하게 세우고 측면에 위치한 요사와의 사이에는 조금 여유 있는 마당이 형성된다. 산지의 대지조건에 맞춘 자유스런 배치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웅전 앞쪽 한단 아래 작은 못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무고주 7량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웅전 규모로서는 다른 건물에 비해 작은 편이다. 기단은 큰 막돌 두벌대로 쌓고 덤벙주초로 초석을 삼았다. 배흘림이 있는 원주를 쓰고 주심포식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평방 위에 헛첨차가 있는 포작을 올린 다음 다시 뜬창방을 놓아두었다. 대들보 위에 포기둥을 세우고 외부로 우미량을 끼웠다. 고려말 조선 초 목조건축에서 흔히 보이는 건축기법을 쓰고 있으며, 내부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닷집이 짜여져 있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이 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개축된 것이지만 건축구조와 양식으로 볼 때 고려말기적 건축기법이 부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엿 볼수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2
홍주성(洪州城)
Hongjuseong/Fortress

 

대 지 위 치 ;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98
주 요 용 도 ; 도성
대 지 면 적 ;  67,771㎡
준 공 년 도 ; 축성/고려말기
                   수축/1451년(문종 1년), 1824년(순조 24년), 1870년(고종 7년)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산성이 특히 발달해 왔으나, 구려말 고종때부터 사회구조의 변화로 읍성을 쌓기 시작하여 1492년 임진왜란때 왜구의 침입을 받은 이후, 특히 18세기 전반기부터 읍성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하였다. 홍성은 옛부터 충청도 서해안을 지키는 주요 거점이었다. 그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 홍주성과 홍주목의 동헌이었던 안회당, 그 대문이었던 홍주아문 등이다. 홍주성을 처음 쌓은 정확한 기록은 없
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성의 규모와 형태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각 관읍의 읍성을 쌓게 되는데, 이 성도 1451년에 새롭게 수축하였다. 아마도 조선 초기에 지방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각 지방의 읍성을 새로 쌓았는데 이 성도 문종 1년(1451)에 새롭게 수축한 것으로 보여진다. 현종 때 한번 중수했고 고종 7년(1870년)에 홍주목사 한응필이 각지에서 석공들을 동원하여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 서, 북 세 곳에 문을 세웠다. 안회당은 현재의 홍성군청이 신축되기 이전에 18명의 홍주목사와 여러 홍주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사무실로 쓰였다. 고종 때 대원군이 안회당 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현재 전국에서 원형대로 보존된 4개의 동헌(전북 정읍시 태인동헌, 전북 고창군 무장동헌, 충북 괴산군 청안동헌 및 안회당) 중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003
조양문(朝陽門)
Joyangmun/Fortress Gate

 

대 지 위 치 ;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113-1외
지 역 지 구 ; 일반상업지역
주 요 용 도 ; 읍성
준 공 년 도 ; 축성/고려말기
문화재구분 ; 사적 제 231호                   

 조선초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각 관읍의 읍성을 쌓게 되는데, 홍주성도 1451년에 새롭게 수축하였다. 1870년(고종7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을 받았는데 동문을 '조양문(朝陽門)' 서문을 '경의문', 북문을 '망화문'이라 이름지었다. 이 읍성은 한일합병 후 1913년 일본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서문을 없앴고, 1915년에는 북문을 없앴다. 현재 성벽 810m와 조양문, 홍주관아문, 그리고 관아건물인 안회당, 근래에 연못 가운데 세운 여하정이 남아있다. 조양문(朝陽門)은 1870년(고종 7년) 성을 개축할 때 다시 세운 문으로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조양문은 서울의 남대문처럼 홍성읍내 한복판, 도로 위에 버티고 서 있다. 홍주성의 동문으로 홍주성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 고종 7년(1870)에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이다. 홍주성과 조양문, 홍주아문이 함께 사적 제 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정기를 꺾기 위해 서문, 북문은 철거하였으나 조양문은 홍성읍민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철거하지 못하 였다. 현재는 남문(홍예문), 서문(경의문), 북문(망화문), 동문(조양문) 중 동문인 조양문만이 남아 있다. 고종 43년(1906년) 의병운동 당시 문루가 파양된 것을 해방 후에 중수하고 단청을 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004
노은단
Noeundan/Shrine

 

대 지 위 치 ;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산21-2
지 역 지 구 ; 산림보존지구
주 요 용 도 ; 사당
준 공 년 도 ; 1676년

 
사육신의 거두인 성삼문은 고려말 학자로써 외조부 박  첨의 고택에서 1418년 출생하였 으며, 남달리 글씨와 문장이 뛰어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었다.  이 노은단은 숙종 2년(1676년)에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해 내었는데, 그 후 1864년 대원군 섭정 당시 노은서원은 철거되 고 당시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현 노은단에 매몰하였다. 그리고 단을 모아 노은단이라 하여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제향을 올 리고 있으며, 노은서원 유허비와 성삼문 선생 유허비가 있다. 노은리와 접하여 있는 대인리에는 성삼문의 부모 묘소와 처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005
여하정(余何亭) 과 안회당(安懷堂)
Yeohajeong & Anhwedang

 

대 지 위 치 ;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동헌
문화재구분 ; 사적 제231호
준 공 년 도 ; 1970년,1896년

 안회당
(安懷堂)은 홍주목의 동헌으로, 오량으로 된 22칸의 목조 와가이며, 고종7년(1870년) 4월에 상량하여 전 주민의 정성과 정교한 기술로 완성한 관서로, 현재 안회당과 취은루는 사료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안회당 뒷뜰과 연접한 소당위에 있는 여하정(余何亭)은 고종 33년(1896년)에 이승우 목사가 신축한 수상정으로 목조기와의 육각형 수상정자이다. 규모는 3평 5합 5작에 불과하나 옛 연못을 연 련하여 누운 고목은 고색 창연하고 수면을 장식한 연꽃과 금붕어는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옛 청수정 자리에 여하정을 신축한 이래 역대 홍주목사들이 하루를 즐겼던 곳이며 결성현이 없어지면서 현청에 있던 빙심헌이란 편액을 옮겨다가 이곳에 심었었는데 망실되었고 언제부터인가 여하정이란 편액이 걸려있었다. 6각기둥에는 시액 12현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작자는 알수없으나 시의 내용으로 보아 여하정을 지은 홍주목사 이승우가 지은시로 추정하고 있다. 대원군이 안회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그후로 안회당이라고 하였으며, 정면 7칸, 측면 3칸의 'ㄱ'자 평면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홍성군청 사이트

 

006
홍주아문(洪州衙門)
Gate of Hongjuamun

 

대 지 위 치 ;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지역

주 요 용 도 ; 대문
준 공 년 도 ; 1870년

 
홍주동헌 아문은 동헌 안회당의 외삼문으로서 1870년(고종7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과 문루를 대대적으로 수축할 때 세운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3량집 맞배지붕으로 남아있는 아문 중 가장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대개 이 지방 관아문은 중층 누각형식인데 비해 홍주 관아문은 단층 문간채 형식이어서 특이하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007
조응식 가옥(趙應植 家屋)

Jo Eungsik's House

 

대 지 위 치 ;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309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98호
준 공 년 도 ; 19세기 중반

 비교적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주변에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고, 대지도 비교적 여유있으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 사랑채, 안채를 비롯하여 별당, 문간채 그리고 여러동의 광채를 포함하여 모두 크고 작은 10여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여러 건물 중 'ㄱ'자형 안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一'자형 평면이다. 가옥은 문간채·사랑채·안채를 중심축선에 배치하고 동측에 별당, 창고가 있고, 서측에 외양간과 헛간이 배치되어 있다. 정면의 문간채를 들어서면 횡으로 긴 사랑마당이 있고, 사랑마당 동측에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서측에도 안채로 통하는 작은 쪽문이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북편에 'ㄱ'자로 배치하고, 동편에 창고가 배치되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배치형태로 보면 튼'口'자 집 구조이다. 정침의 동편에 있는 별당은 또하나의 마당을 중심으로 정면과 양 측면에 창고를 두었고, 주위는 담을 둘러 폐쇄된 외부공간을 만들었다. 집 앞에는 연못을 두고 주변에 소나무, 버드나무 등 각종 나무를 심어두었다. 사랑채는 정면 5칸으로 전면과 좌측에 퇴칸을 둔 1고주 5량집 구조이다. 평면은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사랑 2칸, 대청, 작은사랑이 있고, 부엌 상부는 중앙칸을 막아 앞쪽은 루마루, 뒷쪽은 다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외벌대를 만든 기단 위에 다시 네벌대 기단을 만든 2중 기단이다. 초석은 방형초석을 놓고 방주를 썼으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ㄱ'자 평면으로 정면 5칸에 좌우에는 퇴간을 만들었다. 안방 남측에 2칸의 부엌을 두고 안방 북측에는 1칸 크기의 작은 방을 두었으며, 작은방 뒷편에 만들어 둔 골방은 처마밑에 헛기둥을 내어 확장했고, 퇴마루끝 모퇴부에는 토광을 두었다. 대청 동측 후면칸은 벽과 문을 달아 사당방(廟室)으로 꾸몄다. 건너방 동측 퇴칸은 정면쪽 모서리에 작은 광을 두고 그 후면은 긴 광을 두었다. 광의 가운데 칸 툇마루 하부는 아궁이 함실을 설치해 두었다. 기단은 사괴석 네벌대로 만들고, 방형초석에 방주를 세웠다. 대청마루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부엌쪽은 맞배지붕이다.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대청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판대공 세워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안사랑채라고도 부르는 별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2칸에 방을 두고 동편에 부엌, 서편에 마루방을 두었다. 이 건물에서는 평면의 측면 간살잡이가 다르다. 즉, 동편은 1칸통은 명확하게 2칸으로 간살을 잡고있으나, 이를 제외한 부분 즉 서측의 3칸통은 가운데 열을 1칸으로 하고, 전후로 반칸씩 퇴칸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전후에 퇴칸마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가운데 방 후면에는 좌우 1칸크기의 방을 달아 반칸 정도가 튀어나가고 말았다. 사괴석 두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방형초석을 놓은 다음 방주를 세웠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대문 좌우에는 방과 광, 헛간을 두었다. 문간을 중심으로 동측에 2칸의 곳간, 서측으로 마루곳간과 2개의 방을 각각 배치하였다. 서측 끝에는 반칸을 내달아 하부는 부엌을, 상부는 다락으로 사용한다. 이 가옥은 공간적으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외부공간의 구성을 보면 크게 3개의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안채공간이고, 마지막으로 안사랑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안사랑채 공간이다. 배치의 기본적인 구성은 충청지방의 여유있는 튼'ㅁ'자집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나 부속건물이 다른 가옥에 비해 특히 많이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앞에는 충청지방에서 흔히 볼수 있는 연못을 만들어 공간의 여유를 느끼도록 하였다. 각 외부공간 사이는 창고와 외양간, 담 등으로 구획하여 엄격하게 공간을 격리하고 있으며, 이는 외부공간을 구분하기 위하여 창고를 많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저장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8
엄 찬 고택(嚴 燦 故宅)

Eom Chan's Old House

 

대 지 위 치 ;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9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231호
준 공 년 도 ; 1670년경

 사육신인 성삼문의 외손 엄  찬이 살았던 집으로, 성삼문은 외가가 있는 이 마을 노은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을의 북편에 수리봉과 닭제산이 솟아 있고, 두 산자락이 남으로 흐르면서 가옥의 배경을 형성한다. 마을 앞으로 낮은 구릉이 동편의 임정재로 이어지면서 좌청룡을 만들고, 수리봉의 한 자락이 서편을 감싸면서 우백호를 이룬다. 서편의 마을 어귀는 새갓이들과 이어지면서 시야가 터져 있다. 새갓이들 가운데로 금마천이 북으로 흘러 무점말에서 삽교천과 합쳐진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는 풍수적으로 내수구가 되고, 금마천은 외수구가 되는 풍수형국을 만들고 있다. 이 가옥에는 원래 사랑채와 문간채도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안채에 붙은 익실, 중문간채만 남아 있다. 평면은 'ㅂ'자 모양으로 정면쪽으로 날개부분이 빠져 나왔다. 이러한 안마당이 트이지 않고, 실의 한쪽이 밖으로 길게 빠진 평면구조는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옥구조이다. 이러한 평면의 가옥을 '날개집'이라고 하는데 대개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길게 뻗어 앞을 가로막는 형태가 된다. 그러나 이 가옥에서는 'ㅂ'자가 거꾸로 배치되어 있는 형상이어서 영남지방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안마당이 트이지 않은 평면구조는 영남지방의 그것과 닮았다.
 안채의 중심부에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해 두었다. 대청 서측의 안방 앞쪽으로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누다락을 만들어 안방에서 출입하도록 하였다. 안대청의 서측 익랑은 길게 누다락을 설치하여, 하부는 광으로 쓰고, 상부는 다락방으로 쓰고 있다. 안대청의 동편에는 판벽으로 막아 곳간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서익랑의 남측 끝에는 마루칸을 두었다. 안마당은 트이지 않은 '口'자집으로 규모도 작아 폐쇄감이 강하다. 안채의 기단은 4자 이상으로 높여 남측 중문간채와는 단차가 심하다. 안채의 구조는 1고주 5량집으로 하고, 종보 위에는 표주박모양의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현재 안채를 제외한 사랑채나 부속 건물이 없어 전체적인 배치구성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이 가옥의 안채만으로 보면 충청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폐쇄된 배치구조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급하지 않은 입지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안채의 대지는 급한 구릉에 배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배치에 따라 안마당의 폐쇄감이 강하게 되고 안대청이 높아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대청과 지붕선을 맞추기 위하여 양 익랑까지 높아지게 되었다. 양 익랑이 높아지므로서 마치 중층과 같은 형태가 되어 누다락을 만들 수 있도록 되었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9
전용일 가옥(田溶一 家屋)

Jeon Yongil's House

 

대 지 위 치 ;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362
문화재구분 ; 충남민속자료 제11호/1985.12.31.
준 공 년 도 ; 조선 숙종조

 처음에는 안동 김씨 집안의 가옥이었으나 후손대에서 전씨의 소유로 바뀌었으며, 숙종조때 처음 건립되었다. 갈산면 소재지에서 서측으로 200여m 떨어진 대로변으로, 갈산중학교 인근에 위치한 주택이다.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결봉산 자락과 서쪽에 위치한 삼불산 자락이 만나 마을 북편을 막아주는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두자락 사이로 운곡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마을 앞들에서 와룡청과 합수된다. 주산격인 결봉산 자락이 마을의 동편에서 좌청룡을, 삼불산 자락이 서편에서 우백호를 만들고,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있으며, 동에서 서로 와룡천이 흘러 지나가는 풍수적 국면을 가지고 있는데, 이 들을 건너 행산리에 김좌진장군 생가터가 있다.
 전용일 가옥은 문간채나 부속채 없이 '口'자집 평면에 안채, 사랑채, 곳간 등이 연결되어 있다. 주변에 부속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정면의 중문을 지나면 곧바로 안마당으로 진입한다. 안마당의 크기는 좌우폭에 비해 전후의 깊이가 깊은 장방형이다. 마당 가운데 둥근 화단을 두었다. 안채는 2칸통의 안대청을 가운데 두고 대청 서측에 안방을, 동측에 건너방을 두었다. 건너방 북쪽 끝에 작은 마루방을 덧붙여 마치 날개집처럼 밖으로 1칸이 빠져나갔다. 안방의 서측 모서리에는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다락을 꾸몄다. 건너방 남측 익랑에도 2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다. 이 부엌 상부도 다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방 전면은 반칸으로 퇴칸을 만들어 툇마루를 설치하여 안대청과 연결시켰다. 서측 익랑에는 방과 창고를 두었다. 이 중 큰방은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간채에는 마루를 깐 곳간 2칸과 동편 모서리에 큰 창고를 두고 있다. 문간채와 서측 익랑 사이에는 뒤뜰로 나가는 작은 협문을 두었다.
 이 가옥은 안마당이 트이지 않은 완벽한 '口'자집이다. 영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충청도 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평면구조이다. 충남지방의 경우 대개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트여두는 튼 '口' 자집이 많다. 가옥이 자리잡고 있는 대지는 평지여서 안채와 사랑채의 단차가 없다. 이러한 대지조건 임에도 불구하고 안채와 사랑채를 완벽하게 붙여만든 '口'자 집이다. 다만 안마당은 경상도의 것에 비해 크게 만들었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불과 몇 개의 사례가 있을 뿐이다. 기본적인 배치형태는 영남지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크게 만든 안마당을 보면 호서지방의 특징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건립당시 소유주가 안동 김씨였던 것이 이런 배치형태를 만들게 된 요인이 추정된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10
김우열 가옥(金宇烈 家屋)
Gim Uyeol's House

 

대 지 위 치 ;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234
문화재구분 ; 충남민속자료 제10호/1985.12.31.
준 공 년 도 ; 19세기 중엽

 갈산면 소재지에서 서산으로 가는 옛 국도변에 자리한 이 집은 19세기 중엽에 건립되어 변형이 거의 없이 전해오는 중부지방의 규모가 큰 농가주택이다. 지리환경은 전용일가옥과 흡사하며, 평지에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 그리고 광채가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의 서측에 있는 대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간다. 대문의 출입은 곧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문과 마주치는 벽쪽에 작은 광을 가로막아 한 번 꺾여져 들어가게 하였다. 넓은 안마당엔 작은 정원이 있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사랑채, 북측에 안채, 동측에 아랫채를 배치하여 튼 '口'자집이 된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서측 2칸은 대문간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4칸통은 4개의 방을 두었다. 각 방의 전면은 퇴칸으로 하여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낮은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세웠다. 안채는 'ㄱ'자 평면으로 가운데 2칸은 안대청이고 대청 좌우로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했다. 대문간 쪽으로 꺾어진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반대편으로 꺾어진 끝부분에 2칸 크기의 건너방을 두고 건너방 외벽에 아궁이 함실을 만들어 두었다. 방과 안대청 앞쪽으로는 퇴칸으로 만들어 툇마루를 길게 연결해 두었다. 사랑채와 같이 외벌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썼다. 안마당 동편을 가로막고 있는 아랫채는 'ㄱ'자 평면이다. 이 아랫채는 원래 광채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방을 들여 살림공간으로 사용하게 했다. 후면으로 급한 구릉이 배경을 형성하고 있지만 가옥의 대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다. 건물의 배치는 서로 연결시키지 않고 떨어지게 배치하여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口'자집이 된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충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잇는 배치구조이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용일 가옥과 한 마을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안마당이 터지지 않은 '口'자집인 것과 비교된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