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홍성-01

참고문헌;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11
신경리 마애석불(新耕里 磨崖石佛)
Mae Stone Buddhist Statue at Singyeongri

대 지 위 치 ;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산81
수          량 ; 1좌
주 요 용 도 ; 마애불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문화재구분 ; 보물 제 355호/1963.1.21.    

 돌출된 바위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높이 4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다.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풍만하며, 잔잔한 미소가 흘러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목 밑에서는 굵직한 몇가닥의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아래 쪽은 가느다란 선으로 도식화 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파낸 바위면을 이용해 희미한 음각선으로 윤곽만을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얼굴 윗부분은 입체감이 있고 원만한데 비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양감이 약해져 균형이 깨지고 있는 작품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12
한용운선생 생가지(韓龍雲先生 生家址)
Birth House of Han Yongeun

 

대 지 위 치 ;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주 요 용 도 ; 주택
구         조 ; 가구식 초가지붕
준 공 년 도 ; 1879년

 싸릿대 울타리로 복원된 만해선생의 생가는 초가지붕으로 방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의 전형적인 충청지방의 농가주택이다. 댓돌이며 툇마루가 한없이 정겹고 우물과 장독대를 돌아 집 뒤 야산 언덕배기를 올려보면 적송 과 조릿대가 자란다. 방 안에는 만해의 영정과 앉은 뱅이 책상 하나가 쓸쓸히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부엌 옆은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이고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이 보관된 헛간이다. 마당을 둘러보면 작은 연못과 정자가 들어서있고, 오석에 새겨진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은 방문자들의 눈길을 끈다. 생가지 입구에 '만해 체험관'과 바로 인근에는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라는 사당이 있다. 1879년 이곳 성곡리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선생은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면서 저항 문학에 앞장섰는가 하면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1944년 5월 9일 66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여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선생은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교를 통한 애국청년운동과 독립운동사상을 복돋워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에 추서되었으며, 만해의 동상은 홍성읍내에서 보령으로 향하는 21번 국도변에 있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013
경덕단 숭덕재(景德壇 崇德齋)
Gyeongdeokdan Sungdeokjae/Shrine

 

  

대 지 위 치 ;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264-4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주 요 용 도 ; 사당
구         조 ; 가구식
준 공 년 도 ; 1970년

 여양진씨(驪陽陳氏)의 시조공과 그 아들인 참지정사공( 參知政事公) 휘준(諱俊)의 단소(檀所)를 1970년에 마련하고 숭덕재 (崇德齋)를 건립하였으며, 1986년부터 이 곳에 직손 등 모두 11위의 단비를 모시어 성역(경덕단)으로 하고자 단장하고 진씨 대종회 주관
으로 매년 양력 10월 3일 정오에 전국의 종인들이 모여 제사를 드리고 유덕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인걸지령 여양진씨의 발상지이며, 후대에 많은 인물들이 태어난 곳으로 1982년 이후 네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014
김좌진장군 생가 및 사당(金佐鎭將軍 生家, 祠堂)
Birth House, Shrine of General Kim Jwajin




대 지 위 치 ;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규          모 ; 1,861㎡
주 요 용 도 ; 주택, 사당, 전시시설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충남기념물 제 76호/1989.12.29.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인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기념관, 사당이 함께 모여있는 이곳 갈산 행산리의 지형은 대체로 온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 넓은 들과 한 눈에 들어오는 얕은 구릉을 넘어 행산리에 이르면 시야가 크게 트인 대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김좌진장군(1889-1930)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김형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하다고 소문과 함께, 놀랄 만한 선행을 많이 하였다. 부유한 명문대가의 출신으로 17세에 가노(장군의 집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줘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80칸이나 되는 집을 학교부지로 내놓으면서 현 생가지로 이주 하였는데, 지금 갈산고등학교 교지가 원래 그의 생가였다. 1907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다가,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한 청산리대첩 등을 이끌면서 민족 자주독립에 앞장섰다. 1925년 김 혁과 함께 신민부(新民部)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9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구성하여 주석에 올랐다.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당원에게 암살당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대대로 살아온 이곳에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본채, 문간채와 사랑채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구국의 이념으로 순국하신 백야 김좌진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1997년부터 건립사업을 추진하여 생가로부터 300m 떨어진 장소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사당에서는 매년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추모대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