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논산-00

참고문헌; 논산관광가이드/1999, 대전충남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1
윤  증선생 고택(尹 拯先生 故宅)
Old House of Yunjeung


대 지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
지역
주 요 용 도 ; 주택
준 공 년 도 ; 18세기초
문화재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90호/1984.12.24.

 조선 숙종때 성리학자인 명재(明齊) 윤 증선생(1629-1714) 고택으로, 윤 증이 생활하던 원래의 고택 을 인근 병사마을 유봉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1681년 까지도 유봉에 살았다고 하니, 대략 말년인 18세기 초에 교촌리 현 위치에 새집을 짓고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일 건물을 보수하면서 일부 세부기법 등이 조선 후기의 기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건축적 특징으로 볼 때 18세기 후반의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가 동측으로 치우쳐 배치되고 사랑채 주변에는 담을 두지 않아 가옥 전체가 개방된 분위기를 주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4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2칸에는 사랑방을 두고 동측에 대청, 서측에는 높은 누마루와 부엌이 배치되었다. 사랑채 서편에 붙어있는 문간채를 지나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 '자 형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집이 된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에 각각 익랑채를 연결하였다. 안채의 대청이 특히 크다. 이 때문에 안마당이 개방되고 밝은 느낌을 주고 있다. 안채 구조는 양통집과 같이 맞보로 이어진 3평주 3량인데 대청 중앙만은 긴 보를 건너질러 5량집으로 구성했다. 막돌 허튼층 기단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방주를 썼다.
 이 주택은 호서지방의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당을 생략하고, 대신 사랑채 공간을 조금 크게 하여 별당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 입면으로는 사랑채와 안채가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후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안채와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고택 앞에는 연못과 방장산을 만들어 신선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 지방 민가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다.
 윤 증선생은 한양 정선방에서 윤선거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부 윤 황의 유언을 받들어 관직에 나가기를 거부하였다. 1663년 학행으로 수차 벼슬을 주었으나 사퇴하고 1676년 니산의 유봉으로 이사하여 후진을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다. 후에 다시 조정에서 우의정으로 불렀으나 사양하여 세상에서 백의정승으로 추앙을 받았다. 사후에는 문도들이 용계서원을 세워 그를 모시고, 인근의 노강서원에도 윤 증선생을 향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윤 증이 말년인 18세기초에 건립한 것이다. 후일 건물을 보수하면서 일부 세부기법 등이 조선 후기의 기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건축적 특징으로 볼 때 18세기 후반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고택이 있는 교촌리 남쪽으로 개자들이 펼쳐지고, 들 가운데로 노성천이 흘러 지나간다. 북편으로 약한 구릉이 솟아 니산(尼山)이 되고, 니산 자락이 주택의 배면을 형성하고 있다. 니산 자락이 남으로 흘러 마을의 계면부를 형성하면서 서측에 노성향교를, 동측에 고택을 점지하였다. 고택의 동편으로 작은 구릉을 넘어가면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궐리사(闕里祠)가 자리잡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정려각을 비롯하여 노성향교등 조선시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고택의 정면에 연못이 있으며, 연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고대 신선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 지방 반가에서 간혹 보이는 특징이다. 사랑채가 중심축에서 동측으로 치우쳐 배치되고 사랑채 서편에 문간채가 이어져 안채 앞을 가로막으며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주변에는 담을 두지 않아 가옥 전체가 개방된 분위기를 주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두고 있다는 집주인의 심성을 표현하는 것 같다. 사랑채는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3면에 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서측의 마루바닥을 높이 들어올려 하부에 아궁이 함실을 두고 있다. 높은 축단위에 정면4칸, 측면 2칸으로 동에 대청, 가운데 2칸에는 사랑방, 서쪽칸은 높은 루마루와 사랑부엌이 배치되고 중문간과 접해 방 2칸을 연결했다. 이 가옥에서 사랑채의 배치는 동편에 치우쳐 있지만 진입과정에서 보이는 입면에서는 그리 치우쳐 보이지 않는다. 즉, 서측의 부속공간과 그 건물의 측면이 좌우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좌우 대칭적인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이 또한 균제된 입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정면의 칸수를 짝수인 4칸으로 계획하여 정면길이와 높이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비례를 조정하였다. 만약 정면의 칸수를 3칸이나 5칸으로 만들 경우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비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몸채는 좌우를 비대칭으로 만들어 엄격함을 순화시킨 배려도 읽을 수 있다. 사랑채 서편에 붙어있는 문간채를 지나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전체적으로 튼 '口'자집이 된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에 각각 익랑채를 연결하였다. 안채의 대청이 특히 크다. 이 때문에 안마당이 개방되고 밝은 느낌을 주고 있다. 서측 익랑에는 안방을 가운데 두고, 웃방과 부엌을 배치하였다. 서익랑의 평면은 전후로 퇴칸을 두고,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동익랑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다. 평면은 안마당쪽으로 전퇴를 두어 마루를 깔아 안대청과 연결시키고 있다. 동서 익랑채 부엌상부는 모두 루다락을 설치해 두었다. 안채의 구조는 양통집과 같이 맞보로 이어진 3평주 3량인데 대청 중앙은 긴 보가 건너가고 5량집으로 구성했다. 막돌허튼층 기단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방주이다. 사랑채 구조도 1고주 5량집으로서 안채와 유사하다. 방주의 높은 초석과 장대석 축대, 댓돌사용이 고급스럽다. 중앙 2칸을 꺾음 대문간으로 사용한 중문채도 맞거리 5간으로 모임지붕이고 안채 서편에 있는 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박공지붕인데 구조는 안채와 같이 3량집이다.
 사랑채의 입면구조는 팔작으로 처리하여 안채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와 가깝게 붙어있고, 행랑채와도 연결되어 있어 입면구조를 아름답게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채를 별도로 떨어진 듯 처리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는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후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안채와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심축선은 이 두 건물을 비켜가고 각 건물의 세부는 비대칭으로 처리하여 상황조건에 충실하려는 주기론적 이념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건축공간의 배치에는 시대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조선조의 유가사상은 주택공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면에서 후면으로의 종방향, 좌(동)에서 우(서)로의 횡방향에 따라 각 공간의 위계성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2
노성
산성(魯城山城)
Mt.Noseong Fortress Wall

대 지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산1-1
규         모 ;
성주위894m, 면적 52,148㎡
구         조
; 퇴뫼식 산성
준 공 년 도 ; 백제시대
문화재구분 ; 사적 제393호/1995.8.2.

 백제군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올 듯한 성은 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 군사요충지로 쓰여졌으며, 현재 봉수대 등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면 논산, 공주, 부여방면 등이 한눈에 들어 오는 곳이다. 노성산성은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가곡리와 상월면 산성리·신충리 사이에 위치한 표고 348m의 노성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퇴뫼식의 석축 산성이다. 성 둘레는 894m로 성의 4벽은 모두 자연석을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20×60cm 정도의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한 단씩 수평을 맞추면서 바른층쌓기로 쌓아 올렸다. 높이는 서쪽이 4.2m. 남쪽이 6.8m이며, 성벽은 많은 부분이 무너졌으나 서, 남벽 일부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서쪽 문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데 폭은 6m이다. 성 안에서는 장대지, 봉화대를 비롯한 다수의 건물지가 남아 있으며, 서벽과 북벽에서 성문지가 확인된다. 우물지는 성 안에 3개소, 서벽 밖에 1개소가 남아 있으며,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성 안의 건물지 주변에는 백제시대의 와편과 토기편, 그리고 분청사기, 청자, 백자편 등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이로 보아서 이 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해서 사용된 성이었다고 추정된다.노성 산성은 위치로 볼 때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아서고 남으로는 논산 평야가 훤히 보이는 곳이며, 황산성, 월성산 봉수, 황화산성, 외성리 산성과 연결되면서 신라의 진격을 막는 기능을 하였던 성으로 추정되며, 정상부분에는 경사면을 깎아 흙으로 만든 보루가 있고, 산꼭대기에는 장군의 지휘대로 추정되는 곳과 지휘대 동쪽으로 조금 내려온 곳에 봉화대로 추정되는 부분이 25m 정도의 석축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 논산관광가이드 논산시청/1999, 백제역사유적 자료실

   

003
이 삼장군 고택(李 森將軍 故宅)

House of General Lee Sam

  
 

대 지 위 치 ;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51
문화재구분 ; 충남민속자료 제7호
준 공 년 도 ; 1727년(영조 3년)

 조선 숙종, 영조때 무관을 지낸 이 삼장군(1677-1735년)의 고택으로, 이 삼 장군은 감역(監役)을 지낸 이사길의 아들로 태어나 윤 증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29세때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비롯하여 포도·어영·훈련대장, 형조참판,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거치면서, 이인좌난 평정, 화차제조 등에 큰 공헌을 세웠다. 이 고택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727년 영조가 하사한 것이라 한다.
 계룡산 줄기가 남으로 길게 내려오다 한 번 솟으면서 국사봉을 만들고, 이내 그 끝을 맺으며 국사봉의 서편으로 낮은 구릉이 만들어지다가 개자들을 만나면서 그 자락을 내리고 만다. 고택이 위치하고 있는 주곡리는 말 그대로 '술골'이다. 조선조때 이름은 주막리, 동주막. 서주막. 마근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골은 입구가 마치 병목같은 형국이며, 마을을 들어서면 북편으로 가옥이 배치되어 있고 남측으로 농경지와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지금 10여개의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이 가옥은 마을의 중심부에 급한 구릉을 배경으로 서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마을 계면부 구릉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에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그 후면에 '?'자 평면의 안채를 연결한 튼'口'자집이다. 동편에 정면 4칸의 문간채를 세우고, 안채의 동북편 구릉위에 담을 둘러친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가옥의 대지는 다른 가옥에 비해 급한 구릉이다. 고택의 앞을 지나 동편에 위치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측면과 안채의 익랑채가 보이고,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의 전면부에 대문이 있는 것에 비해 이 가옥에서는 동편 측면에 솟을대문이 있다. 이 대문간은 최근 복원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동편 3칸에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고 전면에 퇴칸을 달아 높게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툇마루 아래는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사랑채 서편의 4칸은 온돌방을 두지 않고 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로 3자정도 높게 만들고, 초석은 덤벙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방주를 썼으나 부재가 조금은 빈약해 보인다. 사랑채 후면열 좌우에 중문을 두어 안채와 구분하고 있다. 안채는 후면 가운데 안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각각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해 두었다. 안대청 전면은 퇴칸을 만들고, 퇴칸과 대청 사이는 문을 달았던 문설주가 있으나 지금은 문이 없어지고 없다. 좌우의 안방과 건너방 남측에 붙여 각각 부엌을 두었는데 동측 부엌은 1칸통으로 작고 서측의 부엌은 2칸통으로 크게 만들었다. 안방의 후면에는 2개의 작은 골방을 두고, 서편에 안방과 골방 사이에는 작은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안대청 동측의 건너방 외부에도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안채의 동측 익랑에는 2칸의 방을 두고 방의 외부에는 나중에 퇴칸을 덧달아 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이 익랑채는 나중에 웃사랑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원래의 사랑채는 아랫사랑이 되었다. 안채의 기단은 구릉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축대 겸 기단이 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지방의 다른 반가 안채 기단보다 훨씬 높은 2자정도가 되었다. 초석은 방형으로 다듬은 것과 덤벙주초를 혼용하고 있다. 기둥은 사랑채와 같이 방주를 썼으나 부재는 사랑채보다 견실하다. 사당은 안채의 동북편 높은 구릉을 정지하여 배치해 두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사당 후면은 넓게 확보하여 안채 후정과 연결되게 하였다. 대문간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을 근래에 복원하였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가옥으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가옥을 진입하기 위해서는 서편에서 집 앞을 지난 다음에야 동편에 있는 대문을 들어서게 된다. 이는 마을의 입지조건과 가옥의 대지조건을 고려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배치계획은 풍수지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의도로 생각되며, 이는 동편에 대문을 두어야 하는 요구 때문에 진입을 길게 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 다음은 대지조건이 급한 구릉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랑채의 기단과 안채의 기단이 높아졌고, 안마당을 크기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옥 구조는 충청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일개 왕정의 사은으로 건립된 가옥으로 보기에는 규모나 구조부재가 조금은 빈약하며, 사랑채의 부재는 이 삼장군의 명성이나, 다른 가옥에 비하여 어딘가 모르게 흘대한 느낌이 든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4
윤 황선생 고택(尹 煌先生 故宅)

House of Yunhwang

 

대 지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
문화재구분 ; 충남민속자료 제8호
준 공 년 도 ; 1730년(영조 6년)

  파평윤씨 윤 황의 종가로 6대손인 윤정진(尹定鎭)이 영조 때인 1730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따라서 윤 황의 생존시에는 이 가옥이 이곳에 없었다. 윤황은 1571년(선조4)년 윤창세의 아들로 태어나 알성시 을과에 장원급제하여 후일 대사간,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를 주장한 이귀, 최명길을 면박하고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의 아들 윤선거는 병자호란후 과거의 뜻을 버리고 금산에 퇴거하여 김집에게 사사하며 송시열과 함께 성리학에 힘을 썼다. 숙종대 소론의 거두였던 명재 윤 증선생은 선거의 아들이자 황의 손자가 된다. 조선 중기 이후 17세기는 농업생산력을 배경으로 상품화폐 경제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대동법 실시를 비롯한 수취제 개편이 단행되며, 이와 관련하여 신분제의 변화, 향촌사회의 변동 등 사회구조 전반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던 시기이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더욱 가증시킨 요인이 되었다. 인근 교촌리에 있는 윤 증고택이 18세기초에 건립되었고, 이 가옥도 이 무렵 이건된 것으로 본다면 이 당시 시대적 여건에 따라 종가와 파종가의 대대적인 이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가옥이 있는 마을은 노성면의 서측 공주시 탄천면과 부여 초촌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편에는 호암산 끝자락이 남으로 뻗어 2개의 봉을 형성하면서 막혀 있고, 남·서·북으로는 낮은 구릉과 넓은 들로 형성되어 있다.
 가옥배치는 전면에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후면에 크게 담을 두르고 'ㄱ'자형 안채, 광채, 그리고 사당을 두고 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담을 두지 않고, 넓게 터져 있어 개방된 공간구조인 반면 안채는 주변을 담으로 둘러 공간을 폐쇄하고 있다. 그러나 담으로 둘러싸인 안채공간은 안마당이 넓고, 안채는 'ㄱ'자로 트여 있어 폐쇄되어 있어도 트인 듯한 여유로운 공간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운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사괴석 세벌대 기단을 만들고, 초석은 방형과 덤벙주초를 혼용하였다. 기둥은 모두 방주를 쓰고, 정면열 기둥에는 다른 부재를 끼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으로 미루어 다른 곳에서 이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가운데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동편의 건너방 정면에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사괴석 두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썼다. 무고주 5량집 구조에 종보 위에는 사다리 모양의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안채의 동편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광채가 있다. 자연석외벌대 기단에 덤벙주초를 쓰고, 방주를 세웠다. 다른 건물과는 달리 우진각지붕이다. 안채와 광채를 포함하여 담으로 둘러치고, 사랑채 바로 뒤에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대지가 그리 급하지 않아 안채와 광채를 가깝게 붙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안마당은 매우 넓게 확보될 수 있었다. 넓은 안마당에는 화계(花階)를 만들어 두었다. 안채의 동북편 높은 구릉에는 계단을 만들고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이 가옥은 18세기초에 이곳으로 이건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지는 약한 구릉을 크게 3단으로 조성하여 상단에 사당을 배치하고, 중단에 안채와 광채, 그리고 하단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사당이 배치된 부분을 제외하고 안채와 사랑채는 약한 구릉이어서 중단과 하단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대지조건을 지니게 되었고, 이 때문에 건물의 배치는 상당히 여유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채와 안채는 중간에 단을 달리 하면서 담을 두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이며, 동편에 떨어져 광채를 두어 넓은 안마당을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여유스러운 배치는 충청지방의 전형적인 가옥형태이다. 마을의 가장 후면에 배치되어 있고, 가옥 앞으로 후손 가옥과 타성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사랑채 동측에는 연못을 만든 흔적이 있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5
노강서원(魯岡書院)
Nogang Seowon/Shrine


대 지  위 치 ;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227
재          료 ; 목구조
문화재지정 ; 충남 유형문화재 제30호
준 공 연 도 ; 1675년(숙종 1년) 창건, 1781년(정조 5년) 중수

 숙종때 윤 황을 주향으로 창건되어 1682년 시액되었다. 숙종때에는 정쟁으로 사액 현판이 철거되기도 하였으나, 복액되면서 1781년 중수되었다. 충남에서 돈암서원과 함께 대언군의 서원철폐를 면한 곳이다. 현재 윤 황과 그의 아들 윤선거, 손자인 윤 증을 제향하고 있다. 구릉을 등지고 남서향인 임좌병향(壬座丙向)으로 전면에 강학공간, 후면에 사당이 배치된 '전학후묘'식의 배치이다.      

 

006
쌍계사 대웅전(雙溪寺 大雄殿)
Ssanggyesa Daeungjeon/Temple



  

대 지 위 치 ;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21
지 역 지 구 ; 자연보존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1738-39년(영조 14-15년)
문화재 지정; 보물 제408호/1963.9.3.

 고려 때 행촌(杏村) 이 임선생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순수한 모습으로 이조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한때 화재로 소실된 후 조선 후기인 1716년 2층 대웅전을 중창하였으나 1736년 11월 또다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739년 재중건 되었다. 이 절은 한때 호서지방의 대가람으로,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큰 중정을 두고 전면에 중층 누각 봉황루를 두었다. 중정 안쪽에는 대웅전, 서쪽에 명부전, 동쪽에 요사채를 배치해 두었으며, 대웅전 서편에 나한전을 두고, 그 남쪽에 산신각을 배치해 두었다.
 
이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굵기가 일정치 않은 민흘림기둥이 섰다. 기둥 중에는 원목을 정갈하게 마름질하지 않은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도 보이는데, 이러한 건축기법은 조선 중기 이후에 간혹 사용되다가 후기에 오면서 흔히 사용하는 기법이라 하겠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용두와 연꽃 등을 조각하여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내부의 후불벽 앞에는 긴 불단을 만들고 석가여래 삼존불을 안치하였다. 불상의 상부에는 화려한 닷집을 세우고 그 주위로 학(鶴) 조각을 달아 두어 마치 하늘나라의 불궁(佛宮)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옛부터 모빌같은 형상의 조각품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면 5칸에는 각각 2분합 꽃살창을 달았다. 연화 목단 등 여섯 가지를 조각해 두었는데 이 꽃살창으로 인하여 대웅전 전체가 더욱 화려하게 보여지고 있다.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고, 2004년 새롭게 단장을 하였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정면의 문은 앞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새김을 하고 있다. 꽃창살의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하는데, 이는 불교 법전의 윤리에 따라 조각이 되어있고, 안팎에서 경지가 내부는 순수함이, 외부에서는 화려함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는데,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은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하지만 닷집의 천장에 메달려있는 용의 머리조각이 내려앉아서 안전진단을 하는 등 보존상의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저녁때 불명산(418m) 계곡따라 은은히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불심의 자비를 더해준다는 쌍계사는 다포계 건물로 주칸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다양한 꽃살문을 조각하여 더욱 유명하며, 대웅전 경내의 천장에 메달려있는 날아가는 학 형태의 목제 모빌이 한충 더 눈을 끈다. 이 사찰은 고려 말엽에 중수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모두 불탄 것을 영조 때 재중수하였는데, 모든 기둥이 괴목임에 반하여 좌측의 측면 기둥은 칡뿌리로 되어 있어 이를 만지면 아품과 공통이 없이 생을 마감한다는 전설로 많은 내방객들이 관심을 끌고있다. 이 절은 고려 충신 이색이 절의 연대기를 썼다고 한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논산관광가이드 논산시청/1999

 

007

연산 돈암서원(連 遯巖書院)
Donam Confucian Shrine, Yeonsan

 

대 지 위 치 ;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
지역
대 지 면 적 ; 81,933

주 요 용 도 ; 서원
준 공 년 도 ; 창건/1634년 이건/1881년
문화재 지정; 사적 제383호

 대전에서 논산으로 향하는 국도1번, 연산을 지나 5분여 지나면 왼편으로 나즈마한 언덕에 쉽게 눈에 들어오는 건물로 주변환경이 아늑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사계 김장생 타계 3년 후인 1634년 창건되어 효종 때인 1659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훗날에 김 집, 송준길, 송시열을 각각 추가로 배향 하였다. 이 서원을 돈암이라 부른 것은 서원 서북쪽에 '돈암'이라는 돼지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원래 서원은 지금보다 아래에 있었으나 1881년 홍수때 물이 차므로 조금 높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평지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하였으나 전면에 위치한 강당이 중심축에 있지 않고 약간 서측으로 비켜 직각 배치되어 있다.
 사당(유경사. 충남유형문화재 155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면 열은 퇴칸이고, 후면 2열은 내부공간을 꾸며 김장생, 김 집, 송준길, 송시열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고주 5량집 구조에 겹처마 맞배 지붕을 올렸다. 응도당(충남유형문화재 156호)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후면열 양 측면에는 문을 달아 마루방을 꾸몄는데 남측에 2칸, 북측에 1칸을 두었다.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풍판을 달고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퇴칸처럼 달아 냈다. 양성당은 '거경재(居敬齋)'라고도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각 칸을 하나씩의 방으로 꾸미고 가운데 3칸 전면에는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고 후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정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목판을 보관해 두었던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후편에 있는 숭례사에는 화려한 입구부터 시작하여, 담장에 새겨진 글씨가 기하학적으로 보여 더욱 화사함을 드러내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서면 후대에 만들어 놓은 계단석이 너무 계획없이 쌓여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008

연산 아문(連山 衙門)
Yeonsan Amun/Gate



대 지 위 치 ;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228-1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
지역
주 요 용 도 ; 관아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 지정; 충남유형문화재 제 9호(1973.12.24.)

 조선시대 연산현(連山縣)의 관아를 출입하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양식 2층 누각 목조건물로 기둥 모양의 초석(礎石) 위에 둥근 목재 기둥을 세워 누(樓)마루를 깔았다. 누마루 아래는 3문(門)을 달아 통행로로 이용하였고 위층 누마루에는 사면에 계자각(鷄子脚)을 세우고 그 위에 난간하엽(欄干荷葉)을 올려 돌림대를 받쳤으며 난간 하부를 청판으로 막았다. 창방 위에는 소로를 놓아  도리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여덜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앞뒤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상부에 직접 뜬창방을 엇갈려 내목도리를 받치게 하고 뜬창방 위에 얹은 기둥머리로 종량(宗樑)을 받치고 있다. 종량 위의 파련대공(波蓮臺工)은 표면에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누각 뒤에는 객사(客舍) 터가 남아 있다. 아래층은 각 칸마다 문을 달아 통행로로 이용하였고, 위층은 누마루로 4면에 난간을 둘렀다. 주춧돌이 없는 대신 돌기둥으로 아래층 중간부분까지 오도록 하였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이어댔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 연산현 청사(廳舍)의 정문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조선 후기 관아건물 중 대표적인 양식의 문루이다.

참고문헌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9
계백장군 묘(階伯將軍 墓)와 충장사(忠壯祠)
General Gebaek's Tomb & Chungjangsa


대 지  위 치 ;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4
규          모 ; 둘레 약 47.6m 높이 약 4.5m
수          량 ; 분묘 1기
문화재지정 ; 충남 기념물 제74호/1989.12.29.

 가장골 묘를 계백장군의 묘로의 고증은 구전되어 오던 계백장군의 묘소를 유래와 지명전설을 토대로 정립한 것은 부적면민들로 구성된 계백장군 묘소성역화 추진위원회와 전 부여박물관장이었던 고(故) 연재 홍사준 선생의 공이었다. 묘소의 방향이 정남방향으로 백제분묘와 같은 방향으로 설치된 점과 묘소 뒷쪽의 충장산, 충혼산, 충훈산, 수락산으로 불리워 장군의 죽음과 같은 맥락의 지명유래가 있고, 장군의 시체를 가매장한 데서 이곳 지명이 가장(假葬)골이고 마을 지명이 충곡리라 칭하는 점과 현지 주민들에게 장군묘로 전해져 내려왔고, 백제 최후의 결전장이던 황산벌이 묘소와는 근거리에 있는 점 등으로 고증절차를 거쳐 1989년 충남도기념물로 지정받았다. 부여의 백제사적 연구회에서는 계백 장군의 유적을 찾아 헤매인지 20여년만에 큰 수확을 올렸다. 학자마다 서로 달리 주장하던 황산벌 전쟁터, 탄현산성, 장군의 묘소, 출생 및 수련장 등을 확인하여 사필을 바로 잡기에 이른 것이다. 이의 근거로는 첫째, 탄현은 동성왕 때 신라를 방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 동북편 일명 숯고개 혹은 쑥고개로 불리는 곳에 쌓은 테뫼식 석성이고, 둘째, 황산(黃山)벌 전쟁터는 연산면 신양리 황산 부락을 기점으로 펼쳐진 산록 평원이며, 셋째 계백 장군의 묘소는 논산군 부적면 신양리(新良里) 충훈산(忠勳山 일명 首落山) 아래의 가장골에서 찾아냈으며, 또한 출생 및 수련장은 충남 부여군 충화면(忠化面-옛날 八忠面) 천등산 일대인 것을 밝혀 내게 된 것이다.
 백제군사박물관 경내에 있는 이 묘와 계백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충장사는 박물관이 개관된 2005년에 준공되어, 매년 제례를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010

관촉사(灌燭寺)
Gwanchoksa/Temple

 

대 지 위 치 ; 논산시 은진면 관촉동 254
규         모 ; 불상높이 18.12m 둘레 9.9m
준 공 년 도 ; 고려 목종 9년(1006년)
문화재 지정; 석등 보물 제232호, 미륵보살 제218호/1963.1.21.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년)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연대 고찰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아침 햇살이 비쳐지는 미륵보살의 미소가 자비로움을 더해주는 은진 미륵이 있는 관촉사는 고려 광종 19년(968년)착공하여 1006년에 준공한 국내 최대 석조미륵보살로 부처상이 면류관을 쓴 것은 당시 국교이던 불교의 교리를 펼치며, 호남평야를 향하여 왕권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관촉사는 논산 시내에서 3km 남짓 떨어진 반야산(100m)기슭에 있다. 이 사찰에는 고려 광종 19년(967년)에 착공하여 38년 후에야 혜명스님에 의해 완공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이 있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이 바위로 불상을 조성하게 했다. 흔히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이 불상은 높이 18.12m, 둘레 9.9m, 귀의 길이 3.3m, 관높이 3.94m로 국내 최대 석불이다. 또한, 경내에는 관촉사 석등(보물 제 232호), 배례 석등 (충남유형문화재 제 315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참고문헌 ; 논산관광가이드 논산시청/1999, 한국관광공사 홈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