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논산-01

참고문헌; 논산관광가이드/1999'

   

011
개태사(開泰寺)
Gaetaesa/Temple

대 지 위 치 ;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 29-1외
규          모 ; 2,000㎡

문화재구분 ; 시도기념물 제 44호/1983.9.29.
준 공 년 도 ; 고려 태조 1986년 중건

 고려 태조 왕 건이 후삼국을 통일 후인 태조19-23년(936-940년)에 건립한 사찰로 그 내역은 '고려사'와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천호산 산정에 감도는 흰구름은 개국사찰의 위용과 함께 온누리에 펴저나가는 기백찬 주변을 느낄 수 있다. 그 기록 에 의하면 개태사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약 4년간에 걸쳐 축조했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 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사운은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즉 고려 말기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해 잦은 방화와 약탈을 당하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된 채 방치되어 왔는데 1934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사찰이 재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때 재건된 사찰은 본래의 위치는 아니며, 원 사찰은 현재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곳에 옛 절의 유지가 남아 있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년)에 옮겨진 것으로, 경내에는 개태사지 삼존불상(보물 제219호/1963.1.21.)이 있는데,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이고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는데,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 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대전과 논산을 잇는 국도 1호선 가로변, 천호산(365m)에 자리하여 눈에 잘 띠는 이 사찰은 많이 훼손이 되어 있다가 1986년에 영주 부석사의 형태를 축소시킨 모양으로 주칸을 신축하였다. 경내에는 옛날의 거대한 규모를 말해 주듯이 직경 3m, 높이 1m가 되는 대형 가마솥이 남아 있으며, 이 솥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부산항 부두에서 움직이지를 않아서 못가져간 후 서울 국립박물관에 보관하다가 이리로 다시 옮겨져 왔다.    

참고문헌 ; 논산관광가이드 논산시청/1999, 한국관광공사 홈사이트

 

013
파평윤씨 재실(坡平尹氏 齋室)
Papyeong Yunssi Jaesil



대 지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121
재          료 ; 목재,석재
수          량 ; 건물 5동
문화재지정 ; 충남 문화재자료 제299호/1988.8.30.
준 공 연 도 ; 조선시대

 파평윤씨 재실로 일명 병사(丙舍)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재실형태이다. 1630년대에 윤순거가 선조 묘소 수호사로 지었던 건물과 덕포공 진의 재실을 포함하여 구한 말에 건립된 성경재, 영사당 관리사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당초 수호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정면7칸 측면2칸의 민도리집으로 지붕은 방주를 사용한 팔작 지붕이다. 영사당은 5칸 건물로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전면 모두 소로수장을 하여 품위를 높였으며, 지붕은 팔작 형태이다. 또한 덕포공재실은 “ㄱ”자형 구조로 맛배와 팔작형태의 지붕이며, 기둥은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였고, 집전면은 모두 소로수장으로 처리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민도리집 형태이다.

 

014
덕포선생 고택(德浦先生 故宅)
Deokpo Old House



대 지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27
재          료 ; 목재,석재
문화재지정 ; 충남 문화재자료 제359호
준 공 연 도 ;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문신 파평 윤 진(尹 搢;1631-1698)선생의 재실이다. 파평윤씨 재실과 바로 연계되어 있는 이 가옥은 “ㄱ”자형 구조로 맛배와 팔작형태의 지붕이며, 기둥은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였고, 집전면은 모두 소로수장으로 처리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민도리집 형태이다.

 

015
종학당(宗學堂)
Jonghakdang



대 지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95
규          모 ; 건물 1동(정면 3칸,측면 2칸)
재          료 ; 목재,석재
소          유 ; 파평윤씨 노종파 종중
문화재지정 ; 유형문화재 제152호/1987.12.30.
준 공 연 도 ; 1643년(조선시대)

종학당은 조선 인조21년(1643년) 윤순거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건립하고 종약을 제정하여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여 합숙교육을 받던 교육도장이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하여 학사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에 이르러 동토선생의 5대손인 정규가 현재의 종학당을 다시 재건축하였다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서 중앙1칸은 대청을 겸한 통간마루를 설치하였고, 양쪽 1칸은 방을 설치한 한옥 8작건물이다. 이 종학당에서는 일반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를 정하고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운영되다가 합방 이후 신교육제도의 도입으로 폐쇄되었다. 그러나 1988년 종중에서 염못을 파는 등 대규모로 주변을 정리하여 현존하는 서당중 가장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016
노성향교(
魯城鄕校)
Noseong
Hyanggyo/Shrine

 

대 지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8
규         모 ;
건물 1동(정면 3칸, 측면 2칸)
구         조
; 목구조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기념물 제118호/1997.12.23.

 노성향교는 본래 노성면 송당리 월명곡 근처(현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창건하였다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은진향교와 같은 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700여년 경에 윤증 고택 바로 옆인 현재의 자리로 향교를 다시 이전하였다 하나 정확한 연대나 이전 사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명륜당의 현판에 의하면 숭정 4년(1631년)에 현감이 문묘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증자(增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의 성위를 모시고, 동무에는 송조(宋祖)1현과 동국(東國: 우리나라) 9현을 서무에는 송조 1현과 동국인 우리나라의 9현등 모두 5성 20현 등 25위를 모셨다. 유림에서는 선현의 위덕을 받들어 나가기 위하여 매년 음력 2월과 상정일(그 달의 첫 번째 '丁'자가 들어 있는 날)에 선현들을 위한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이를 석존제(釋尊祭) 또는 대제(大祭) 석제(釋祭)라고도 한다.

 

017
충곡서원지(
忠谷書院址)
Chunggok Seowonji
/Site

대 지 위 치 ;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13
규         모 ;
건물 3동(정면 3칸, 측면 2칸)
구         조
; 목구조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기념물 제12호

 의자왕 20년(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침입 하였을 때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 신라 김유신의 군사 5만여명과 대결 4차례에 걸쳐 물리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계백장군의 충성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백제의 유민들이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오다가 조선 숙종6년 (1680년), 인근인 이곳에 서원을 건립하고 계백장군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근래에 이르러 본격적인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원은 선현을 제향하는 사우와 유생들을 교육하는 재가 결합된 사학을 일컫는다. 이 서원은 계백장군을 주벽으로, 조선시대 사육신인 이 개, 하위지,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성상문, 박팽년과 김익겸(兼)을 함께 모신 사당이었으나, 점차 추배되어 지금은 10개의 위패가 추가되어 총18기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경내에는 성삼문(成三問:1416-1456)의 유허비가 있다. 조선 숙종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며, 19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5년 예전의 위치에 재건되었으나, 사우(祠宇)만 남고 소멸되었던 것을 그때의 초석에 따라 1977년 서원을 다시 정비 복원하였다. 서원의 구조는 홍살문을 입구로 하여 외삼문, 동 서양재, 내삼문, 사우(祠宇)의 순으로 언덕을 따라 서향의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홍살문 입구의 고목이 옛정취를 훔뻑 말해주고 있다. 

 

018
휴정서원(
休亭書院)
Hyujeong Seowon
/Shrine

대 지 위 치 ;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구         조
; 목구조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논산시 향토유적 제16호/1992.10.28.

 이 서원은 1700년(숙종26년)에 창건, 1705년(숙종31년)에 준공하여 찰방을 지낸 류 무(柳 懋)를 봉안하였다. 그후 송익필, 김공휘, 김 호, 이항길, 김상연, 김진일, 김우택을 추가 배향하여 제향해 오다가,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9년 옛자리에 중건하였으나 1944년 탑정저수지 완공으로 수몰될 처지에 몰려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단소를 설치하여 단제를 지내왔다. 1984년 사우(祠宇)를 복설하였으며 1985년 3월 20일 송익필을 주향으로 하여 모두 8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019
임리정
(臨履亭)
Imlijeong

 

대 지 위 치 ;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
지 역 지 구 ; 일반주거
지역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주 요 용 도 ; 누정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 지정; 충남유형문화재 제 67호/1976.6.9.

 조선 인조 4년(1626년)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그가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뒤쪽으로는 사랑방을 2개 꾸며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한식 기와집이다. 임리정은 '시경'의 '如臨深淵 如履薄氷(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 같이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하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늘 자신의 처신을 신중히 하라는 뜻이며, 원래 황산정(黃山亭)이라고 하였다. 금강에 면한 낮은 야산 위에 서향으로 건립하였으며, 정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고 그 중 왼쪽의 2칸은 마루를 깔아 넓은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기단이 높지 않으므로 온돌방 앞면에는 반칸을 안으로 들여 윗부분은 툇마루를, 아랫부분은 함실 아궁이를 만들었다.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주두를 배치하여 초익공식 공포(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목부재)를 짜올렸으며, 쇠서의 형상은 새날개 모양의 전형적인 익공집 형식을 취하였다. 창방(昌枋:대청 위 장여 밑에 대는 넓적한 도리) 위에는 기둥 사이마다 5개의 소로 받침을 두고 주심도리(기둥 중심선 위에 있는 도리)를 받쳤다.
 지붕의 가구(架構) 방식은 앞뒤의 평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갖춘, 낮은 동자기둥을 세워서 종량(宗樑)을 받쳤다. 종량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臺工:마룻대를 받는 짧은기둥)이 배치된 겹처마집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작은 사랑방 1칸이, 오른쪽에 큰 사랑방 2칸이 있으며, 큰 사랑방의 북쪽으로 툇간에 반칸을 더내어 윗방 1칸씩을 두었다.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이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020
팔괘정(
八掛亭)
Palgwejeong



대 지 위 치 ;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구         조
; 목구조
준 공 년 도 ; 1626년(인조 4년)
문화재구분 ; 충남 유형문화재 제76호/1978.3.31.

 이 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우암선생은 대전 가양동에 남간정사를 건립하여 후학을 강학하고 있엇기에,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후학들이 강론을 듣기위해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있고, 건물 뒤의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글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