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세종특별자치시-00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홈사이트,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001
비암사 극락보전 (碑巖寺 極樂寶殿)
Gukrakbojeon of Biamsa/Temple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 4
지 역 지 구 ; 산림보존지구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창건/고려 중기
                   중건/조선 후기
문화재구분 ; 충남유형문화재 제 79호(1978.12.30)

전의역에서 대전가톨릭대학을 지나 지방도따라 남쪽(공주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으나, 사찰의 창건시기를 기록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2천여년 전 한 선제 오봉 원년에 창건한 삼한 고찰이라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충청남도 지방문화재인 비암사 극락보전과 삼층석탑 등 여러 가지 유물로 추정해 볼 때 고려 중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측된다. 비암사 극락보전내 닫집은 그 제작 수 법이 교묘하고 화려하며, 효종 8년(1657년)에 복원되었다. 비암사에서 1960년에 발견된 국보 106호, 보물 367호 및 368호는 백제시대의 석불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주변이 고즈넉한 숲에 쌓여있고, 인적이 드물어 옛 산사의 풍취를 한껏 풍기며, 이곳에 있는 수령 800년이 넘은 느티나무도 볼 만하다.
 
남향으로 터진 그리 넓지 않은 골짜기에 약한 구릉을 배경으로 입지하였는데, 골짜기는 넓지 않지만 가람이 들어선 대지는 비교적 넓다. 가람배치는 넓은 중정을 중심으로 후면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동편에 극락보전, 서편에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다. 중정 서편에 2동의 요사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남측 축대 가까이에 범종각을 세웠다. 대웅전은 근래에 중건한 것이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초석은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은 배흘림이 있는 원주를 사용하였다. 다포식 공포에 봉황과 당초문양을 조각하고 내부 공포에는 연화봉을 조각하여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수미단을 설치한 다음 석가여래를 봉안하였다. 불단 상부에는 화려한 닷집을 설치하였다. 극락보전의 세부기법을 보면 장식이 특히 많이 사용되었고, 주요부재는 초벌다듬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에 흔히 사용하는 건축기법의 특징이다. 이 사찰은 대웅전과 극락보전이 횡으로 나란히 배치하고 그 앞에는 다른 건물을 세우지 않아 전면에 넓은 마당이 만들어지었는데, 이와 같이 여유로운 가람배치는 호서지방의 건축적 특징을 잘나타 낸, 전통가옥을 연상케 한다. 입구를 오르면서 중간턱에 있는 느티나무 한그루는 이 사찰의 유래를 방금이라도 말하여 줄듯, 의연한 자세로 자리하고 있으며, 삼층석탑 주변의 잔디를 따라 펼쳐진 요사채의 자태는 안정적이고 기품이 있어 보는이를 편하게 하여주는 포근한 배치를 지닌 사찰이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002
효부 유언하처 부안임씨 정려(孝婦 兪彦夏妻 扶安林氏 旌閭)
Buan Imssi Jeongryeo/Memorial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서면 와촌리 3구 은암동 1215
수          량 ; 1주
지 붕 형 태 ; 맞배지붕
준 공 년 도 ; 1924년
문화재구분 ; 연기군 향토유적 제 26 호

 효부 부안임씨(扶安林氏)는 동지중추 임두칠(林斗七)의 아들 시윤(時潤)의 딸로 연기군 남면에서 태어나, 기계유씨 유언하(兪彦夏)에게 출가하였다. 출가 후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차도가 없자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드려 치유케 하였으나 다시 병이 재발하였다. 이에 뒷산 높은 봉우리에 제단을 쌓고 시어머니의 병이 쾌차하기를 9년 동안이나 빌었다. 그 정성에 천지신명이 감동하였는지 기도 중에 땅에서는 호랑이가, 하늘에서는 매가 주변을 보호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효성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임씨가 기도하였던 봉우리를 '임씨기도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조선 고종24년(1887년)에 효부 명정을 받았으며,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에 정문이 건립되었다.
 정려각은 사방 1칸으로 은암마을 입구 길 옆에 서있다. 민도리식 맞배지붕의 건물로 일반적인 정려의 건축구성을 하고 있다. 기단은 후대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견치석 쌓기 한 우에 시멘트로 마감을 하였는데, 넓이가 매우 넓어 기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초석은 모를 접은 단주(短柱)형의 방형초석으로 윗면에는 원형의 주좌를 새긴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이며, 건물 네면에는 기둥에 의지하여 홍살을 설치하였다. 민도리집 구조이나 기둥 상부에는 익공형태로 보 아래를 받치는 보아지를 끼워 놓은 것이 특징이다. 가구는 3량가로 보 위에 기둥형의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도록 했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박공부에는 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의 내부 중앙에는 '효부학생 기계유언하처 부안임씨 지려(孝婦學生 杞溪兪彦夏妻 扶安林氏 之閭)'라고 쓴 명정 현판과 '효부임씨 정려기(孝婦林氏 旌閭記)'가 나란히 걸려 있다. 명정 현판은 파랑색 바탕에 글씨를 파 새긴 것으로 글씨는 흰색으로 칠하였다. 또 한쪽에는 '광서십삼년성상 즉조이십사년정해 윤사월초삼일 명정(光緖十三年聖上 卽祚二十四年丁亥 閏四月初三日 銘旌)'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조선 고종 24년(1887년)에 명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려기는 통정대부 전비서원승 안동 김녕한(通政大夫 前秘書院丞 安東 金寗漢)이 쓴 것이다.

 

003
연화사 (蓮花寺)
Yeonhwasa/Temple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서면 월하리 1047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문화재구분 ; 전통사찰지정/1988년

 조치원읍에서 공주 의당 방면인 서쪽으로 약 2km 지점에 낮은 구릉을 등지고 서향 하고 있는 사찰로, 현위치는 고대 사원지와는 관련이 없다. 다만 와즙 1동의 법당이 있었으나, 보물 제 649호(1978.12.7)로 지정된 무인명석불상 부대좌가 발견됨에 따라, 문화재 관리국의 지원을 받아 한식와즙으로 개량하였다. 무인명석불상 부대좌는 장방형인 돌로 측면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650호(1978.12.7)인 칠존석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 불상은 비암사 석상, 정안면 석상과 함께 연기 지방의 고대미술의 판도를 새롭게 정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현 연화사의 소유자인 조창례 씨의 시어머니가 꿈에 계시를 받아 발견한 2개의 불상을 모시기 위해 암자를 지었다 한다. 1988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었으며, 옆에 1987년 보호각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004
유림정
Yulimjeong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세종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로 근간에 붐비기 시작한 금남을 가로지르는 금강가에 대평리에서 5분여 정도 강뚝을 따라 꼬불거리며 가다보면, 주변의 푹경이 남다른 곳에 자리한 정자다. 울창한 나무사이로 금강의 도도한 흐름과 앞으로 펼쳐질 행정도시의 영화를 보는듯한 시원하고 깨끗한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005
독락정(獨樂亭)
Dograkjeong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남면 나성리 101, 산59-1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준 공 년 도 ; 1437년

형          태 ; 팔작지붕
문화재구분 ; 충남문화재자료 264호/1984.12.29.

 독락정은 연기군 남면 최남단의 금강변에 위치하며 앞으로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장남평야가 펼쳐지는 이 일대는 예로부터 연기팔경(燕岐八景)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국도 1호의 금남교 좌측 100m 지점에 자리하며, 주변에는 임씨가묘(林氏家廟)(향토유적 제42호)와 임난수 신도비 등의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강가 절벽에 자리한 독락정은 정자 1동, 일각문 1동, 그리고 일각문(一覺門) 좌우로 전체를 둘러싼 담장으로 일곽(一廓)을 구성하고 있다. 독락정 전면은 낭떠러지 쪽을 향해 열려 있고, 일각문은 배면 쪽에 설치하여 통로로 삼았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전서공 임란수(林蘭秀)(1342-1407) 장군의 둘째 아들 부사공 임 목(林 穆/1371-1448)이 1437년(세조 19년)에건립하였다. 부안임씨 중시조 임난수는 고려 말 공조전서의 벼슬을 살았으며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지로 관직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세종 때 충신 표창을 받으면서 지금 나성리 강산 5정(町)을 하사받았다. 정자에서 동쪽으로 약 3㎞정도 가면 양화리 마을에 이르는데 여기에는 임난수 장군의 사당이 남아 있다. 아들 임 목은 양양도호부사(壤陽道護府使)로 여러 고을을 두루 거치다가 지금의 나성리로 낙향하여 부친의 가묘(家廟)와 정각(亭閣)을 짓고 살았는데,
장군의 제일(음 6월 20일)과 장군의 처 제일(음 12월 20일)에 제사를 지내면서 여생을 보내던 곳이며 경치가 좋아서 휴식처로 쉬어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독락정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양식으로 고대기단(高臺基壇) 위에 8각 고주형 초석을 세웠으며, 초석간의 거리 250㎝, 초석 높이는 137㎝이다. 내후(內後) 어칸(御間)의 사면(四面)에 격자 창살의 문을 돌렸으며, 문은 모두 정자 내부 상단에 설치된 걸쇠에 걸어 개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분합문(分閤門)이다.

 

006
부안임씨 가묘(扶安林氏 家廟)
Buan limssi Gamyo/Tomb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남면 나성리 101, 산59-1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준 공 년 도 ; 1600년대말

문화재 구분; 향토유적 제42호/2003.2.14.

 임씨가묘(林氏 家廟)는 전서공 임란수(林蘭秀)의 절의를 기리는 부조묘이다. 현재는 독락정(獨樂亭)경내에 위치하고 있지만 본래 양화리에 세워져 있었다. 고려말 임fks수는 최 영장군과 더불어 탐라(제주도)를 정벌하는데 큰공을 세운 인물로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공주 삼기촌(현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그렇나 임란수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1419년 세종대왕은 임씨가묘(林氏 家廟)를 써주고 불천지위로 모시도록 명하였다. 또한 사제문도 내려주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시기를 도울만한 기략을 운영하고 세상을 덮을만한 공훈을 세웠다.'고 한다
 전서공파 문헌록의 행단 구사우 실기 (상량문)에 의하면 1430년에는 종손인 임중(林重, 양녕대군 사위, 통훈대부 행평양서윤 장악원정)의 주도하에 5칸 전후튀 규모의 사당 건물이 완성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임란수가 죽자 자손들은 묘소를 연기 동쪽 불파미 임좌(壬坐)의 언덕에 마련하였는데 숙종 5년(1679년)에 8대손 호군 임찬현(林纘賢)이 묘소를 보수하던 중에 376자의 지석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근거로 우암(尤菴) 송시열에게 신도비문의 찬술을 부탁하게 되었다. 송시열은 전서공의 행적에 대하여 '전서공이 몸을 지킴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같다.' 라고 평하고 이를 신도비로 세웠다. 처음에 양화리 행단(현 숭모각) 자리에 건립하였다가 현자리로 이전하였다.

 

007
연기향교(燕岐鄕校)
Yeongi
Hyanggyo/Confucian School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남면 연기리 34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규          모 ; 2,579㎡
준 공 년 도 ; 1647년 이축

문화재 구분; 기념물 제123호/1997.12.23.

 연기향교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조선초 대부분의 각 지방 군.현에 향교가 건립되었던 1407년(태종 7년)-1413년(태종 13년)사이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며, 창건 당시의 위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다.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향교가) 현에서 서쪽으로 1리 떨어져 있다’는 기록과 1824년에 간행된 '연기지(燕岐誌)'의 ‘향교가 현의 동쪽 2리에 있다.’는 기록의 차이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530년부터 '연기지'가 간행된 1824년 사이에 향교의 이건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이건연대나 그 사유는 확인할 수가 없다. 현의 서쪽 1리에 있다가 1647년 현자리로 이전하였다. 향교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남면 월산리 황골마을 입구인 아랫말 야산의 남동향사면 중하단부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는 향교건물의 축대 일부로 보이는 화강암의 자연석재가 주변에서 발견되었으며, 주변에는 무문, 어골문의 회청색 와편과 청자, 분청, 백자편이 산포해 있다.
 현재의 향교 건물은 구릉지의 경사진 곳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남북으로 길게 2단의 대지를 조성하여 하단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상단에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으며, 외삼문 대신 좌우 1칸 규모의 조그만 일각대문으로 정문을 삼고 있다. 또한 연기향교에는 향규 및 향안, 절목, 유생안 등 조선후기 연기지방의 신분구조와 향촌사회 운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008
기계유씨 정려(杞溪兪氏 旌閭)
Gigye Yussi Jeongrye
o/Memorial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 산25-7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준 공 년 도 ; 1727년

문화재 구분; 향토유적 제33호/2001.5.31.

 조치원에서 천안으로 향하는 1번국도의 전동 구름다리 서편 일대에 아늑하게 자리한 석곡리의 마을산 입구에 오래된 정자 나무앞에 세워져 있는 이 정려의 느낌은 우선 포근하였다. 열부(烈婦) 신이초의 처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본래 성품이 어질고 착했으며 또한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이해심이 깊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남편과는 부부 금슬이 좋아 슬하에 10남매를 두고 시부모에 대한 정성스러운 봉양과 함께 일가 친척간에는 화목을 도모하는 효부였다. 그러나 남편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장례를 잘 치르고는 자식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너희 아버지를 정성껏 받들지 못하여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것 같구나. 이제 나 혼자만이 남아 있으니 어찌 부덕을 다한다 할 수 있으랴. 이제 나도 너희 아버지를 따름이 지어미의 본분을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라 하였다.
 이 말에 자식들은 통곡하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내가 죽은 후에도 형제간에 더욱 화목하게 살도록 하거라.' 라고 당부하고는 그 날부터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에 자식들은 울면서 자기들의 효성이 부족하여 어머니가 죽음을 결정한 것이라고 여기고 계속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으나, 끝내 유씨는 식음을 전폐한지 7일만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이러한 유씨의 부덕(婦德)은 세상에 알려지자, 유씨의 부덕을 거울로 삼고자  영조(英祖)15년(1727년) 정려를 명받아,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009
최회 정려(崔澮 旌閭)
Choihoe Jeongrye
o/Memorial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192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유          형 ; 효자문
준 공 년 도 ; 1686년

문화재 구분; 향토유적 제3호/2001.5.31.

 최 회(崔 澮)는 1563년(明宗 18년)다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부잣집 자식같지 않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한 평소에 말이 적고 남의 잘못을 감싸주는 자상한 성품으로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기까지 하여 이웃 어른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런데 나이 13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갑자기 병을 얻어 돌아가시게 되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벗지 않은 채, 삼년 동안 하루같이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는 시묘를 보여 주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이후 최 회는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생원(생원)의 벼슬로 어머님을 즐겁게 해드렸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노환으로 몸져누우시게 되자 자신도 늙은 몸이면서 병시중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유한 가정살림으로 머슴을 두고서도 어머님에 대한 시중은 일체 시키지 않고 손수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았다. 또한 어머니의 병에 좋다는 약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구해 드렸으나 병에 차도가 없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소생케한 출천지(出天地) 효자였다. 그러다 추운 겨울 어머니의 쾌유만을 위하여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매일같이 기도드리다 도리어 자신이 과로로 쓰러져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한편 최 회는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권력있는 집에 드나들기를 삼가하며 항상 가난한 선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청렴결백한 선비로도 명성이 놓았다고 한다. 1686년(肅宗 12년) 명정(命旌)을 받아 정문(旌門)을 건립하였다.

 

010
효교비(孝橋碑)
Hyogyobi
/Monument in Memory of Filial Piety

 

대 지 위 치 ; 세종특별자치시 서면 기룡리 713-55
지 역 지 구 ; 농촌취락지구
유          형 ; 효행비
준 공 년 도 ; 1773년

문화재 구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8호/1984.7.26.

 조치원 시내에서 대전 방향으로 10여분 향하다가 오른편의 양지바른 평원에 자리한 이 비는 조선시대 5대에 걸쳐 7명의 효자를 배출한 홍연경과 그 후손을 기리기 위하여 1773년(영조 49년)에 세웠다. 본래 높은 산 위에 있던 것을 마을 입구로 옮겼고 1995년 연기군에서 효교비각(孝橋碑閣)과 효교정(孝橋亭)을 세워 주변을 정비하였다. 조선시대 기룡리에 살던 공조참의를 지낸 홍연경(洪延慶)은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들 홍연설(洪延卨)도 효성이 특출하여 부모님이 병이나자 부모의 대변을 맛보아 병을 알아서 약을 쓰는 등 지성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그는 호랑벼슬을 받고 사복사정으로 승진되었다가 후에 지평(持平)이 되었다. 손자대(代)에는 우적(禹積), 우평(禹平), 우구(禹九) 3명의 효자가 나왔으며, 증손은 나라에서 복호(復戶)를 받았다. 영조 때 연경의 5세손인 덕후(德厚)의 양자 홍상직(洪相直)이 가전(駕前)의 자리에 있으면서 종종 입조(入朝)치 못해 그 사연을 물으니 고향의 조상묘에 성묘차 다니기 때문이라고 하자, 영조가 감탄하여 홍상직의 고향인 마룡동(馬龍洞)을 효교동(孝橋洞)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고, 후에 자손들이 이곳에 모여 살면서 이 효행비를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