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서천-00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홈사이트,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1  
이하복 가옥(李夏馥 家屋)
Lee Habok Residence

 

대 지 위 치 ;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120
지 역 지 구 ; 준농림지역
규         모 ; 지상 1층
구         조 ; 목조 한식
주 요 용 도 ; 주거시설
준 공 연 도 ; 조선 말기
문화재 구분; 중요민속자료 제197호
지 정 연 도 ; 1984.12.24

 전형적인 농가로 목은 이  색의 18세손이며 중추원의관을 지낸 이병식이 조선말에 안채 3칸을 건립하였다. 그 후 아들인 형규씨가 사랑채와 아래채, 웃채를 증축하면서 전체적인 모습이 형성되었다. 풍수적으로 좋은 양택에 남서향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전통적인 초가집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부농가이다. 건물은 안채와 아랫채, 사랑채, 광채,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口'자형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호주인 이하복은 1910년 이응구의 장남으로 태어나 전신 경기중학교를 다니며, 광주학생사건때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반일운동을 하였으며,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후 보성전문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창씨개명과 징용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개몽운동을 하면서 동강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가옥이 배치되어 있는 이 마을은 북편으로 높은 산이 막아주고, 전면으로는 크지는 않지만 작은 들이 형성되어 앞이 터진 형국이다. 풍수적인 형국을 보면 멀리 장군봉에서 이어진 진산이 동편으로 감돌아 우백호를 만들고, 옥녀봉 줄기가 서편으로 감돌아 좌청룡을 만들어 준다. 마을 어귀의 들을 건너서 화양산이 이 마을의 안산이 되어 풍수적으로 잘 형성된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는 전퇴를 둔 6간 '一'자집에 부엌, 안방, 웃방, 대청, 아랫방을 배열하고 아랫방 앞으로 중문간이 있는 헛간을 덧붙여 'ㄱ'자집이 되었다. 아랫방 끝에도 머리퇴 부분에 마루를 설치했다. 본래 안채는 부엌 1칸과 아래, 웃방 각 1간씩인 전퇴 3칸집이었으나 나중에 부엌을 1칸 더 늘이고, 웃방에 붙여 대청과 아랫방을 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농가의 기법으로 앞쪽지붕이 뒤쪽지붕보다  길게처리된 점이 이채로우며, 기단은 사괴석 외벌대로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썼다. 2고주 4량의 민도리집 구조이다. 이런 4량집 구조는 종도리가 얹어지지 않으므로 초가집에서는 용마루를 둥글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아랫채는 서측에 대문간을 두고, 안채와 나란히 배치하였다. 사랑채와 같아 보이나 아랫채라 부른다. 이 아랫채는 4칸 전퇴집으로 문간, 부엌, 사랑방 2칸이 배열된 끝에 머릿퇴를 두었다. 안채와 같은 1고주 5량집이다. 안마당 서쪽은 두칸 광채를 만들고 안채와의 사이에 뒷길로 나가는 좁은 협문을 시설했고 아랫채와의 사이는 'ㄱ'자로 담장을 둘러 장독대를 두었다. 사랑채는 '一'자 6간 전퇴집으로 부엌, 안방, 웃방에 2개의 광을 덧붙이어, 며느리가 거처하는 독립공간을 만든 특이한 구조로 이는 마치 별채와 같다. 북향한 안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설치해 두었다. 사랑채, 안채, 아랫채의 모서리는 담장으로 연결하고 여기에는 출입문을 두었다. 뒷마당에는 광채, 헛간채 2동을 배치해 두었다. 배치형태로 보아 아랫채가 사랑채 같고, 사랑채는 별채같다. 이 가옥은 초가집이면서 건물을 '口'자로 배치하여 반가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2  
동백정(冬栢亭)
Dongbaekjeong/Camellia Forest



대 지 위 치 ;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14
규         모 ; 지상 1층
정면 3칸 측면2칸
구         조 ; 목조 한식
주 요 용 도 ; 누각
문화재 구분;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69호

 비인읍에서 서해로 내민 반도를 향해 끝부분으로 향하다 해오름 농원을 지나면 두갈래로 갈라지는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높은 굴뚝의 비인화력발전소가 나온다. 이를 피해 안으로 향하는 구석에 자리한 이 누각은 500여년전에 마량리 수군첨사(水軍僉使)가 험난한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게시를 받고, 이곳에 제단을 만들고 주변에 동백나무를 심었다고 전하는데, 그 당시에 심은 나무가 자라서 오늘의 동백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8,000㎡의 면적에 85주의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있는데 매년 4월이면 동백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이 야산의 마루턱에 세워진 누각으로 조병호 선생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마을의 서쪽 산 정상으로 인근에 당집도 있으며, 이곳에 신위를 모시었다. 저원 초하룻날에 마을의 수호와 풍어를 빌어오던 당제는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용왕제 성격을 띠었다. 남편이 바다로 고기잡이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아낙네들은 용왕신을 모시는 신당을 자기 손으로 만드는 꿈을 꾼 후 신당을 지었다고 전하여 오는데, 주변에 동백숲을 이루어 지성을 드리기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해변가 반대편을 감싸는 화력발전소의 공장건물이 풍경을 반으로 잘라내어, 문화재 보호를 외치는 후손들의 행적이 부끄러우나, 어느곳 보다도 자연친화적인 꾸밈을 하려고 애쓴 흔적이 많이 보여서 그나마 위로를 삼고싶다. 발전을 논리로 하여 당시의 타당성이 맞겠지만, 가볍게 생각하도 저지른 환경의 파계는 일순간이지만, 그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지를 일깨워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 충청 마을지킴이-송봉화 당진문화원/1999

 

003  
비인 5층석탑(庇仁 五層石塔)
Biin Five Story Stone Stupa


대 지 위 치 ;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 183
규         모 ; 1기
준 공 연 도 ; 고려시대
문화재 구분; 보물 제223호/1963.1.21.

 지방적인 특색이 강했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탑으로, 옛 백제 영토에 지어진 다른 탑들처럼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의 양식을 가장 충실하게 모방하였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목조건축의 기둥과 벽과 같이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판판한 돌을 세워 막았다. 탑신은 몸돌을 기단에서처럼 기둥과 벽을 따로 마련하여 세워 놓았는데, 각 면의 모습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몸돌 위로는 지붕돌을 얹기 전에 지붕받침을 2단 올려놓았는데 그 모습이 정림사지 5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탑의 기단부는 1층으로 4매의 판석 위에 놓였으며, 네모서리에는 네모진 기둥을 세우고 그사이에 면석을 다듬어 세웠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네모서리에 큼직한 네모난 각 기둥들이 아래로는 기단을 누르고 그사이에 벽면석을 끼웠다. 위로는 지붕받침을 이고 있어, 마치 신을 신고 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느린 경사를 이룬다. 경사면의 아래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위를 받치듯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형태의 크고 작은 돌이 겹쳐 얹혀져 있고, 그 위로 네모난 돌이 놓여있다. 전체적인 세부양식이 정림사지5층석탑을 따르려 힘을 기울인 흔적은 보이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큰 지붕돌, 1층에 비해 갑자기 줄어든 2층 이상의몸돌과 지나치게 큰 각 층의 지붕돌 등에 의해 균형이 깨지고 있다. 하지만,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분포에 따라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참고자료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4  
건지산성(乾芝山城)

Geonjisanseong/Fortress

대 지 위 치 ;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3
주 요 용 도 ; 성곽
규        
  모 ; 160,549㎡
준 공 년 도 ; 삼국시대
문화재구분 ; 사적 제60호/1963.1.21.

 
정상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으로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전기로 보고 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으로, 내성은 흙으로 쌓았고 외성은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쌓았다. 이러한 2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말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산성의 남서쪽 낮은 봉우리에는 2개의 소규모 산성이 있는데, 이는 건지산성에 딸린 부속성으로 방어를 위한 보루로 볼 수 있다. 이 구조 역시 백제식 산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산성의 북쪽은 험준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성벽을 삼았고, 나머지 부분은 흙으로 쌓았으나 심하게 붕괴된 상태이다. 문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성안에 봉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봉서사 서쪽에 건물터로 보이는 계단 모양의 평지에서 불탄쌀과 백제의 토디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산성은 금강 하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 아닌 고려시대 산성 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참고자료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5  
문헌서원(文獻書院)

Munheon Seowon/Confucian School


대 지 위 치 ;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
주 요 용 도 ; 서원
규        
  모 ; 정면 3칸 측면3칸
구          조 ; 목구조
수          량 ; 1 구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문화재구분 ; 지방문화재자료 125호
지 정 일 자 ; 1984.5.17.

 
부여에서 서천으로 향하면서 한산 모시관을 지나, 오른편으로 2km 들어가면 기린산 중턱에 자리한 이 서원은 1594년(선조 27년)에 고려말 대학자인 지방 유림 가정 이 곡과 목은 이 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두분을 모셨다. 1592년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 졌다가, 1610년(광해군 2년) 한산 고촌으로 옮겨서 복원하였다. 1611년 임금으로부터 '문헌'이라는  서원의 이름을 받았으며, 이종학, 이자, 이개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곡(1298-1351)은 한산 출신으로 1317년(충숙왕 4년) 거자과에 합격한 뒤, 도첨의찬성사를 거쳐 한산군에 봉해졌다. 목은 이 색(1328-1396)은 고려 말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성리학자로 정몽주, 길재와 함께 '삼은'으로 불린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철폐되었다가, 1969년 지방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으며, 이후 이종덕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참고자료 ; 서천군청 사이트 

 

006  
청절사(淸節祠)

Cheongjeolsa/Shrine


 

대 지 위 치 ;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 통박골
주 요 용 도 ; 사당
구          조 ; 목구조
준 공 년 도 ; 1710년
소   유   자 ; 기계 유씨문중(杞溪 兪氏門中)
문화재구분 ; 지방문화재자료 399호
지 정 일 자 ; 2008.4.10.

  비인에서 국도를 따라 보령을 향해 오르다가 춘장대해수욕장으로 갈라지는 지방도를 지나면서 오른편으로 보이는 석판안내도를 따라 2km 정도 좁은 포장길을 따라 가다보면 아늑한 산기슭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채가 보이고, 인근 부락 가운데 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일대가 청절사와 죽산박씨 묘소, 명원시인 임벽당 김씨묘소와 은행나무 시비공원으로 유명한 통박골이다. 청절사는 기계유씨 가문의 다섯선생을 배향한 사우이다. 이 청절사는 가운데 사우를 중심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재실이 담으로 둘러쌓여 일곽을 이루고 담장밖에 연접하여 수직사가 있는 사당인 동시에 서원이기도 하다. 이 청절사는 1710년(숙종 46년)에 건립하였다가, 1852년(철종 3년)에 훼철되었는데, 이를 1922년에 재봉안하였다. 1720년(숙종46년) 4월에 연산때 4절신이라 일컫던 서호 유기창(西澔 兪基昌/1437-1514 증 병조판서)을 충청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이곳에 배향한 후에 순차적으로 다른 네분을 추향하였다. 1731년(영조 7년)에는 그의 아들인 정당 유여림(政堂 兪汝霖/1476-1538 예조판서 증 좌찬성), 1852년 가을에는 붕주 유 황(붕주 유 황/1599-1655 충간공 참의 정라관찰사 증 좌찬성), 비슷한 시기에 시남 유 계(市南 兪 棨/1607-1664/이조참판 증 좌찬성), 1856년 가을 송당 유 홍(兪 泓/1524-1594 충목공 좌의정)을 추배하여 왔다.
 유여림은 천성이 담백하고 부귀영화를 꺼려 7년간의 은둔생활을 할 때에도 평범한 촌로같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조선조 중기 이후 이름을 빛낸 기계인은 거의가 그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까닭에 그를 기계 유씨(杞溪 兪氏)의 중흥조라 일컫는다. 유여림의 동생인 유여주(兪汝舟)는 중종때 조정암(趙靜庵)이 주장하여 설치한 현량과(賢良科)에 선발되었으나 기묘사화후 향리인 비인으로 내려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부인인 김씨(金氏)는 유여주(兪汝舟)의 아호를 따서 임벽당 김씨(林碧堂 金氏/1492-1549)라 하는데, 그 녀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12-1559), 허난설헌(許蘭雪軒/홍길동의 저자 허 균의 누나)과 더불어 조선조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유여림의 아들 유 강(兪 絳)은 호조판서 숙민공이 그의 손자요, 유 강의 조카인 유 홍은 좌의정 충목공. 유 강은 중종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로가 순탄치는 모하였다.  그는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어서 당시 외척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을 논핵하다가 여러차례 지방 관찰사로 축출되는 등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 윤형원이 죽은 뒤 중앙에 복귀하여 한성판윤,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냈다. 유 강(兪 絳)은 스스로 "30년 입조(立朝)에 한 번도 권세가 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다." 는 말로써 자손들에게 올바른 몸가짐에 관한 많은 일호ㅘ를 남기었다. 통박골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 시비공원의 주인공인 임벽당의 호는 당시 중국의 황제가 내려 준 것이라고도 전해 내려오는데, 명(明)나라의 열조시집에 김씨의 시 3수가 수록되어 더욱 명성을 날리었다. 임벽당 내외분이 심은 3그루의 은행나무중 현재 한그루가 남아 있어, 그 아래에 시비를 세워 주민들이 그를 칭송하고 있다.

 

007  
신성리 갈대밭 평상

Sinseongri Reed Forest


대 지 위 치 ;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
주 요 용 도 ; 평상
규        
  모 ; 정면 1칸 측면1칸
구          조 ; 목구조
수          량 ; 1 구


 
우리나라 4대 갈대밭중 하나인 이곳은 금강의 백마강이 끝나는 부분인 강경포구를 지나 전라북도 옥구군과 군산시과 마주하는 강어귀를 향하여 널다랗게 펼쳐지는 신성리 갈대밭은 원래 주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게를 잡으러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헤메이던 장소이었는데, 2000년 우리나라와 북한 병사간의 미묘한 우정과 갈등을 그린 영화 JSA(비무장지대)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제21회 청룡영화제와 제3회 도빌 아시아연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하였다. 금강변 하구둑 언저리에 제방을 따라서 폭 200m, 길이 1km 정도로 약 6만여평의 늪지대에는 사람키를 넘은 갈대 숲의 도열로 인하여 지금은 추억의 장소로 변신하였다. 특히 갈대체험장에는 입구의 장승, 나무다리와 높낮은 평상을 갈대숲을 따라 배치하여 소박한 시설들이 깆춰지고, 간간이 팻말에 써있는 문귀가 우리 머리에 오랫동안 남기도 한다.'해장술에 술꾼은 망하고, 본전에 노름꾼은 망한다.' 등등. 길따라 지어져 있는 이 평상은 4각 또는 6각의 지붕은 갈대잎을 엮어서 만든 전형적인 우리나라 전통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갈대(Phargmites Communis)는 외떡잎 식물로 화본목 화본과의 높이 3m정도 되는 여러해살이 풀로 온대와 한대지방의 습지나 갯가, 호수 주변의 모래땅에서 자라며, 이곳은 특히 겨울철에는 고니와 청둥오리 등 철새의 군락지가 되기도 한다. 억새풀은 고산지대에서 주로 자라며, 이와 흡사한 갈대는 주로 습지대에서 
많이 자란다.  

참고자료 ; 서천군청 사이트 

 

008  
서천포 장암진성(舒川浦 長巖鎭城)

Seocheon Port, Jangamjin Fort

대 지 위 치 ;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주 요 용 도 ; 성곽
규        
  모 ; 둘레 1311자
준 공 년 도 ; 1910년

 백제시대에는 '기벌포'로, 고려시대에는 '장암수', 조선시대에는 '서천포 만호영'으로 금강 하구로 진입하는 요로를 지키던 성이다. 현존하는 성은 중종 9년(1514년)축조한 것으로 문헌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성이 있었고, 명신 두영철의 유배지였다고 한다. 성의 규모는 둘에가 1,311자이며, 높이는 9자이나 지금은 동벽,북벽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수 있고 1910년에 지워진 가옥만 한채가 성내에 있다. 서천포 장암진의 만호는 서면 마량진의 첨사지시와 군산의 첨사와 상호 협조하에 금강 하구를 지키는 수군 우두머리였는데, 이 비석은 당시 만호 이이남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을 마을에 방치하다가 1992년에 다시 건립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