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서산-00

참고문헌; 서산시 홈사이트,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1
개심사 대웅전 (開心寺 大雄殿)
Daeungjeon of Gaesimsa/Temple


  

대 지 위 치 ;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1-5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창건/651년(백제 의자왕 14년) 추정
                   대웅전/1484년(조선 성종)
문화재 지정; 보물 제143호/1963.1.21.  

 충남 4대 사찰중인 하나인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1년) 혜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후 고려 충정왕 때인 1350년에 처능대사가 중건하였다 한다. 조선 초에 3중창한 기록이 있어 이 절은 고려 이전에 창건된 사찰임은 분명하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1475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상왕산(象王山/307m) 남쪽 기슭 깊은 골짜기 안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넓은 대지를 확보하기 어려워 대지의 깊이에 비해 좌우 폭이 넓다. 중정을 중심으로 동측 후면에 대웅전, 서측 전면에 안양루, 북측과 남측에 심검당과 무량수전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중정 가운데에는 5층석탑이 있다. 무량수전의 남측으로 요사채가 이어지면서 또 하나의 작은 안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사찰의 중심영역에서 남측에 따로 떨어져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창건 당시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15년(1484년) 6월에 중창한 다포식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하여 조선초기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절을 창건할 때 대웅전을 세웠던 자리에 다시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기둥에는 배흘림이 잘 남아 있다. 천정이나 지붕 구조에서 고려의 기술적 맥락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冥府殿)은 사찰의 중심 영역에서 남측에 떨어져 있으며, 1613년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만들었으며 위에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넣고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부 무출목 2익공 형식으로, 원래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염라대왕 등 10대왕을 봉안한 절의 전각으로 대웅전 다음으로 절에서 중요시하는 건물이다.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비바람을 맊기위한 널빤지가 있는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그 뒷면으로 불단을 조성하여 철로 만든 지장보살과 10대왕을 안치하였는데, 기도의 효과가 크다하여 참배객이 끈이지 않으며, 출입문의 좌우에는 사람과 같은  크기의 사자상을 세워놓았다. 심검당(尋劍堂)은 대웅전 좌측에 위치해 있다. 조선 전기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한쪽에 추가로 증축하여 지금과 같은 'ㄱ'자 평면이 되었다. 전면은 겹처마지만 후면은 홑처마로 하여 전면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서산시 홈사이트,

 

002
해미읍성(海美邑城)
Haemieub Fortress

대 지 위 치 ;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외
주 요 용 도 ; 읍성 및 관아
대 지 면 적 ; 194,102㎡
준 공 년 도 ; 1491년(선종 22년)축성
문화재 지정; 사적 제116호/1963.1.21.  

 이 성은 조선조 초기에 축조된 읍성으로, 해미는 1407년에 현으로 되었고, 그 뒤 1418년에는 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면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성의 둘레는 1,800m이고, 높이는 5m, 내부의 면적은 52,624평에 달한다.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문인 진남루는 원래의 모습이고, 동문과 서문은 1974년 복원되었고, 북문은 암문으로 남아있다. 남문과 서문 사이에 포루가 복원되어 있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의 많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1917-23년 사이에 일본인들이 일부만 남겨두고 거의 모두 매각하거나 철거해 버렸다. 그 후 민가와 학교, 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들어서 있었으나 1975-81년 사이에 붕괴되었던 성곽의 일부를 조사하여 성벽을 보수하고, 성내의 모든 민가와 학교를 성 밖으로 이전시켜 지금은 동헌을 비롯한 아문, 동헌부속실, 책방 그리고 복원된 루문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읍성이란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지성으로 해미읍성 외에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이 유명하다. 둘레는 약 1.8km로 총 면적 6만여평의 거대한 성으로 동, 남, 서의 세 문루가 있다. 최근 복원 사업을 벌여 옛 모습을 되찾아 사적공원으로 조성 되었으며, 조선말 천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곳에서 1천여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성내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있던 감옥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회화나무가 서 있다. 바로 성문 밖 도로 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있어 천주교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성벽 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후기에 중건된 진남문(鎭南門)은 정문으로, 바깥 성벽쪽에는 홍예문을 설치하고, 안쪽에 출입문을 두었다. 홍예문 위에 세운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같은 시기에 중건된 동헌(東軒)은 아문, 책사(冊舍), 부속사와 함께 읍성 안쪽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헌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동헌 뒤에 있는 책방은 고을 원을 보좌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아문은 정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책사(冊舍)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이는 조선시대 평지에 축성한 석성으로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으로 성벽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 하여 탱자성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없어지고 진남문에서 관아문에 이르는 진입도로 주변에만 탱자나무가 있을 뿐이다. 당초 읍성내에는 학교, 면사무소 등의 관공서와 민가가 많이 있었으나, 복원사업 추진을 위하여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관아문과 동헌 등이 있다. 이 읍성에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였고,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정조대왕 당시 잠시 유배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천주교도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을 시켜서 처형하였는데,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형하기 힘들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 하였다. 해미천 옆에는 천주교 박해당시 생매장 당한 무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16m의 순교탑이 있으며 순교탑 앞을 여숫골이라 부르는데 이는 앞서 예수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은 주민들이 이를 여숫골이라고 불려 전해진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중도포커스/1993.3.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서산시 홈사이트

 

003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
Samjonbul Image Carved on Rock Surface/Buddhist Statue




대 지 위 치 ;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
주 요 용 도 ; 불상
준 공 년 도 ; 백제시대
지 정 일 자 ; 1962.12.20

문화재 지정; 국보 제84호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서산 마애삼존 불상은 그늘 속에 묵묵한 표정으로 있다가, 서광이 깃들기 시작하면 은은하게 미소는 짓는 충청도민과 백제 후손을 대표하는 어진 품성을 잘 나타내는 불상이다. 1959년에 발견되어, 65년부터 국보로 지정되어 90년대 말에 들어서서 누각을 짓는 등의 보호 조치를 하고 있으나, 주변의 모습이 많이 유린 당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부처의 미소는 오늘도 서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은은한 미소를 영원히 보내며 서있다. 6세기 말에서 7세기초 서산과 태안반도에서 처음 출현한 이 삼존불은 한국 마애불의 시초이자 대표적 걸작이다. 깊은 계곡 개울가에 은거하듯 숨어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한국 마애불의 백미로 꼽힌다. 가운대 본존불이 있고 좌우로 협시보살이 있는데, 그 바위를 도드라지게 새긴 부조의 정도나 전체적인 표현이 매우 단정하다. 덯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구현한 백제인 들의 미감이 뛰어나다. 특히 이 삼존불의 미소는 네모난 얼굴에 큰 눈, 살짝 벌린 입으로 번져 나오는 모습이 해맑고 복스럽다. 그러면서도 고품스러운 품격이 살아있다.
 
사적 316호인 보원사지 입구 좌측 가야산록에 있는 큰 바위에 조각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오래 되고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에는 여래입상, 오른쪽에는 반가사유상, 왼쪽에는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 으며, 본존불인 여래입상의 높이는 2.8m이다. 6세기 중엽의 백제작품으로 특히 빛 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변하는 특징이 놀라울 정도 로 정교하고 신비해 국보 제 84호로 지정됐다. 이 서산 마애삼존불은 태안 마애삼존불(보물 제432호)과 함께,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낸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고 있다.
 삼존불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에 둥근 맛 이 감도는 윤곽선이나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조각 수법으로 보아 제작 시기는 6세기말 내지 7세기 초 로 보인다. 특히 이 지역은 백제시대 중국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걸작의 불상이라 할 수 있다. 백화산의 돌출한 바위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이 마애불은 중국 문화 와의 해상교류의 흔적 내지 중국 석굴의 영향을 보이는 최초의 예로서 주목되며 돌에 새긴 불상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 다. 또한 팽이모양의 육계, 강건한 얼굴, 당당한 신체와 묵중한 법의등 이 백제불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걸작품이며 중앙에 보살입상이 있고 좌우로 장대한 불상이 서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은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예로 불상의 진가를 더 높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중도포커스/1993.3.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서산시 홈사이트, 사진;유병구/씨엔유건축

 

004
보원사지(普願寺址)
Bowon Temple Site

 

대 지 위 치 ;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 150
준 공 년 도 ; 통일 신라말기-고려 초기
문화재 지정; 오층 석탑-보물 제104호   

  마애삼존불상에서 약 1km의 거리에 위치한 보원사지는 사적 제 316호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전에 폐사된 보원사의 옛터로 추정되며 고승 법인국사가 수도하였다 한다. 현재의 사찰터로 보아 당시 보원사에는 크고 작은 암자 100여개가 운집했으며, 법인국사 보승비의 기록문 내용에 의하면 승려 1천 여명이 기거했다고 한다. 현재 보원사지 내에는 석조 (보물 제102호),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법인국사보승탑 (보물 제105 호), 법인국사보승비 (보물 제106호) 등이 남아 있다.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백제계의 양식기반 위에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고루 갖춘 5층석탑과 통돌을 장방형으로 만든 석조, 고려 경종3년(978년)에 법인국사의 제자들이 그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만든 보승탑,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비 및 큰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행사기를 다는 당간을 세우기 위해 만든 화강석의 당간지주를 볼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서산시 홈사이트

 

005
김기현 가옥(金基顯 家屋)

Kim Gihyeon's House

 

대 지 위 치 ;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465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99호/1984.12.24
준 공 년 도 ; 19세기 중반

 서산시내로 들어가는 국도변에 있는 김공  휘 충신효자문을 지나 뒷편으로 있는 가옥으로 인접해 있는 정순왕후 생가의 작은댁으로 배치형태는 '巳'자형 평면에 '一'자형 사랑채를 붙인 '口'자집이다. 전체적인 좌향은 유좌묘향(酉座卯向)인 동향이지만 사랑채는 정침에 직각방향으로 배치되어 남향을 하고 있다. 600여 년전부터 이곳 한다리에 경주김씨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하는 마을의 주변 지리환경을 보면 서편으로 소심산(蘇深山)이 솟아 그 자락이 남북으로 뻗으면서 서산과 음암의 경계를 이룬다. 동편으로는 농경지와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으며, 동편의 낮은 구릉 너머로 넓은 들이 형성되고, 들 가운데로 대교천이 북으로 흘러 성안저수지로 합수된다.
 이 집은 대문을 동북쪽 모서리에 1칸 크기의 일각대문으로 만들어 두었으며, 이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으로 들어선다. 마당 동편에 행랑채, 서편에 'ㄱ'자 평면의 사랑채를 배치하였고, 사랑채 후면에 '口'자형 안채를 연결하여 정침이 된다. 사랑채 북편에 중문간채, 안채 북편에 초당이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중문간채와 안채 사이에는 협문을 두어 내외를 구분한다. 주변 담은 이러한 부속채 외벽에 맞추어 둘렀기 때문에 건물 크기에 비해 대지는 그리 크지 않다. 안채의 뒤뜰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외부공간은 크게 2개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행랑채·중문간을 포함하는 바깥공간(남성용)이고, 다른 하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건축공간으로 내부공간(여성용)이 된다. 이 두 공간은 협문과 부속채, 담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여 조선시대 유학사상이 건축공간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대청마루를 생략하고 대신 가운데 크고 작은 2개의 방을 두었고, 마루는 정면열의 ⅔를 이용하고 측면에 연결된 익랑에는 부엌과 창고를 두었다. 특히 사랑채 정면에는 차양을 만들어 두었는데, 살림집에 차양은 그리 흔한 시설은 아니다. 사랑채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로 만들고 방추형 초석에 방주를 썼다. 다만 차양에는 8각 장초석에 8각주를 썼다. 사랑채의 구조기법은 안채보다 간결하게 처리되었는데 차양은 반대로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차양 전면은 부연을 단 겹처마인데 후면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사랑채는 모를 굴린 납도리를 썼으나 종도리에만 장혀를 받쳤다. 사랑마당에 면하여 정면에 배치된 행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一'자집 평면이며 우진각 지붕이다. 가운데 곳간과 부엌을 두고 그 좌우에 방과 커다란 곳간을 만들어 두었다. 장대석 외벌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중문간 북쪽 바깥마당에도 3칸집이 있다. 옛날엔 침모가 살았으며 그 옆에 마구간이 붙어 있다. 안채 뒤뜰 마당가에 있는 초당은 3칸의 초가로 방과 광으로 이루어져 내별당으로 사용된 듯 하다. 사랑채 후면에 연결된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간다. 안채는 가운데 안대청과 안방을 두고, 대청 북쪽에 건너방, 남쪽에 커다란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 쪽으로 뻗은 북측 익랑에는 작은 부엌과 방을 배치하고, 남측 익랑에는 2칸의 광을 두었다. 사랑채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익랑에는 헛간, 마루방, 광을 두었다. 안대청의 구조는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익랑부분은 모두 3량집 구조이다. 대청에는 분합문 위에 커다란 교창을 만들어 끼웠다.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지만 배치구조는 서로 다르다. 즉 안채는 남향인데 비해 사랑채는 정침에 직각방향으로 놓아 서향을 하고 있다. 정침 주위에 담처럼 둘러싸는 부속채를 배치해 두고, 부속채 외벽에 맞춰 담을 둘렀기 때문에 대지가 넓게 확보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옥의 배치는 매우 짜임새 있게 보이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충남지방의 반가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약한 구릉이나 평지가 많은 충남지방의 반가는 부속채를 울담안에 두고 대지를 넓게 확보한 다음 부속채 밖으로 담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채의 구성은 안마당에 틈을 두지 않은 완벽한 '口'자 집을 하고 있다. 충남지방의 반가는 튼 '口'자 집인데 비해 이 가옥은 영남지방 반가에서 많이 보이는 '口'자 집의 평면 구성으로 햇빛을 고려한 남도식 배치가 특이하다.
 또한 대문을 행랑채에 두지 않고 모서리 부분에 별도로 만들어 세운 것도 특이하다. 대문을 비롯한 모든 부속채는 우진각지붕으로 처리하여 정침의 팔작지붕과 격식을 달리하여 건물의 형식적 위계성을 표현하고 있다.

 

006
정순왕후 생가(貞純王后 生家) 
Birthplace of Queen Jeongsunwanghu

 

대 지 위 치 ;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464
문화재구분 ; 충남기념물 제68호/1988.8.30.
준 공 년 도 ; 1650년

 이조 영조대왕비인 정순왕후가 1745년 태어난 집으로, 정순왕후의 5대조이며 승지, 충청감사, 관찰사 등을 지낸 김홍욱(金弘郁)이 효종임금의 하사금으로 조선 후기인 1650년경(효종)에 지은 것이라 한다. 경주 김씨 학주공파 시조인 김홍욱은 효종과 친근하게 지냈으며, 김홍욱이 늙은 부친에 대한 효심이 극진한 것을 알고 하사하였는데,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자 15세에 왕후로 간택되었으며, 56세때는 어린 순조를 대신 섭정을 하기도 했다.
 이 가옥과 담을 사이에 두고 동편에 작은댁 김기현 가옥이 자리잡고 있다. 가옥의 배치는 정면에 대문을 두고 그 후면에 사랑채와 안채를 '口'자 집으로 배치해 두었다. 정침 서측에 정면 2칸의 작은 고방과 문간을 두어 안채공간과 구분하고 있다. 사랑채는 가운데 2칸의 사랑방을 두고, 동측 모서리에 1칸의 마루방을 두었다. 사랑방과 마루방 앞에는 3자폭의 쪽마루를 길게 놓았다. 사랑방 서측에 붙여 부엌과 고방을 두었는데 부엌 상부는 다락으로 꾸몄다.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에 방주를 썼다. 사랑채 서측 익랑에 붙여 중문간을 두고 이 문을 통하여 안마당으로 들어간다. 안채는 가운데 3칸통의 큰 안대청을 두고 그 동측에 안방, 서측에 건너방을 두었다. 건너방 북편에는 작은 벽장을 덧달았다. 안방이 있는 동측 익랑에는 커다란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다락을 만들었다. 서측 익랑에는 마루방, 건너방, 고방을 두었다. 안대청 정면 반칸에 퇴칸 마루를 깔고 이 퇴칸 마루와 안대청 사이의 3칸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다. 안방과 건너방 앞에는 좁은 쪽마루를 달아 두었는데, 이러한 세부형태로 보면 안채는 좌우 대칭적 구성인 것을 알 수 있다.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이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방주를 썼다.
 전체가 평지에 자리한 이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의 고저차가 없으며, 안마당은 완벽한 '口'자집 평면이다. 평지에 입지 하면서도 이러한 평면구조는 충남지방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데, 평지가 적은 산간지역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치구성이다. 충남지방에서는 안마당이 트여 있는 튼 '口'자집이 많으며, 건물 간에도 여유를 두고 배치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가옥의 사랑채 공간이 다른 반가에 비해 작은 편이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주로 생활하던 공간으로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도 하는 곳이다. 조선후기 왕후를 배출한 집안이라면 남자들의 활동이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가옥에서는 이러한 활동공간으로 사용했던 사랑채가 다른 곳에 비해 작은편으로,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댁인 김기현 가옥은 '口'자 집이면서 사랑채를 별도로 덧달아 붙인 것과는 다르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7
간월암(看月庵)
Ganweol Rock


  

대 지 위 치 ;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주 요 용 도 ; 암자
준 공 년 도 ; 조선 초기  

 리아스식 해안의 서해에 있는 작은 암자로 조선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근세의 고승으로 일제치하에서 한국불교를 사수한 송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위에 떠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면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서산지구 간척지 개발에 따라 육지와 항상 연결되는 지형으로 바뀌었다.
 또한 간월도에서 생산되는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있는데 이 행사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청결한 아낙네들이 소복(흰옷)을 입고 마을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하여 굴탑 앞에 도착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풍년 기원제를 지낸다.

참고문헌; 서산시 홈사이트 

 

008
일락사(日樂寺)
Illaksa/Temple

 

대 지 위 치 ; 서산시 해미면 황락리 3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문화재자료 제193호/1975.2.15.  

 일락사는 일락산 (521.4m)의 서남편에 위치한 고사찰로 창건연대는 기록된 문헌이 없다. 다만 사찰에 전하는 사기와 1970년대 이후에 발간된 각종 서산군지와 해미읍지의 기록에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의현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인근에 있는 해미읍성의 성곽 축성이 완공되기 4년전인 조선 성종 18년(1487년)에 중수하였고 중종 25년(1530년)과 인조 27년(1649년)에 헤미읍성 객사 중수때 일락사도 함께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사찰 경내에서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불대좌와 초석이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3층 석탑 1기 (문화재 자료 200호)가 현존하고 있다. 일락사의 대웅전(현 명부전)의 건립 연대는 전각내에 걸려 있는 중창기에 1919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왜정 초기에 중창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일락사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에 건물을 해체하여 그 자리에 대적광전의 향 우측에 옮겨 복원하고 명부전이란 현판을 달았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목조 불전으로 익공계 단층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며 기둥은 원주이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면적은 48.6㎡ . 창호는 정면 3칸, 모두 2짝이며 교살문이다. 향 좌측면 귀기둥에 붙여 외짝 교살문을 달고 그 밖의 부분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외부의 익공은 끝에 연봉을 얹고 전체적으로 조각을 가하여 단아한 형태미를 보여주는 건물이다.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대의 의현선사가 개창한 것으로 전하나 연혁은 구체적이지 않다. 사찰의 현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이 사찰은 여러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가장 이른시기의 것은 조선시대 중기인 해미읍성이 축성될 때 사찰도 함께 중수된 사실로 미루어 그 이전부터 존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찰은 현재 대웅전과 요사체로 현음당외의 요사를 합하여 3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건물은 지은 시기가 서로 다르고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일제시기에 크게 보수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사찰내에는 1919년에 제작된 탱화가 많이 있다.

참고문헌; 서산시 홈사이트 

 

009
천장사(天藏寺)
Cheonjangsa Temple

 

 

대 지 위 치 ;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1
지 역 지 구 ; 보존녹지지역
주 요 용 도 ; 사찰
준 공 년 도 ; 백제 무왕 34년(633년) 창건
문화재 지정; 문화재자료 제202호  

 연암산에 있는 암자로 창건연대와 탑의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찰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담화선사가 수도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말 고승 경허선사와 근세의 고승 송만공(1871-1946:정읍태생) 대사가 이곳에서 불법을 계승한 사찰로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버스 종점을 지나 산길로 차를 오르다보면, 더 이상 오르기가 민망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 주차를 하고 급경사의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면 작은 이정표부터 등장한다. 천장사의 인법당앞에 축조된 높이 3m의 칠층 석탑은 기단부는 지대석과 면석을 1개의 돌로 만들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갑석을 올려 놓은 형식인데, 그 폭이 1층 석탑부의 옥신석과 같은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가 아닌 후대의 양식이거나 아니면 원래의 기단부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탑신의 옥신석에 모서리 기둥을 표현한 점.옥개석 밑에 3개의 층급받침을 둔 점, 1층 탑신부에 비해서 2층 이상의 크기가 크게 줄어드는 비례를 보여주고 있는 점등이 고려 시대 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4층 옥개석과 마지막 층 탑신부 사이의 돌은 제 위치가 아니며 상륜부에는 노란 보주 보개가 올려져 있다.

참고문헌; 서산시 홈사이트 

 

010
서령관아문 및 외동헌(瑞寧官牙門 및 外東軒)
Gate of Seoryeong Gwana & Oedongheon

 

대 지 위 치 ; 서산시 읍내동 관아문길 1
주 요 용 도 ; 관아
면          적 ; 관아문 :37㎡, 외동헌:121㎡
준 공 년 도 ; 조선후기, 1978 이건 및 보수
문화재 지정; 유형문화재 제41호/1976.1.8.  

 조선시대 서산군의 관아로 객관, 동헌, 누정 등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관아문과 외동헌만 남아있는데, 조선 고종 4년(1867년)에 당시 서산군수 오병선이 재축한 것이다. 오병선 군수는 대원군 섭정시 복원한 경복궁과 경회루 복원 공사를 총지휘했던 사람이다. 1978년부터 2년 동안 동헌을 시청 서편으로 옮겨지었고 관아문도 보수하였는데, 조선시대 서산군의 행정을 수행하던 관아건물로 '여지도서(餘地島嶼)'서산군지에 객사와 동헌을 비롯 많은 건물명과 칸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 관아문(官牙門)은 조선시대에 서산군 관아의 정문으로 문루(門樓)형식으로 축조된 건물로 처마밑에 서령군문(瑞寧郡門)이란 현판이 달려있다. 서령이란 이름은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붙여진 서산시의 옛 지명 '서령부' 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이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배치로 화강석 4각 장초석이며 하층부는 기둥사이에 각각 대문을 달아서 통행하도록 하였고 상층은 루(樓)마루를 조성하고 주위에 계자 난간을 돌리고 좌측 북단칸에 누각(樓閣)으로 오르는 계단을 가설하였다. 기둥 상부의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으로 익공을 창방과 직접 연결 주두(住頭)와 결구한 후 그의 주심부에 주두와 익공을 1개 더 놓아서 대량을 받도록 하였으며, 내부는 초각(草刻)을 한 보아지를 돌출시켜 대량의 내단을 받쳤다. 그리고 창방에 운공(雲工)이 결구된 화반형(花盤形)의 초각반(草刻盤)을 중앙칸에 3구 양단칸과 측면칸에 각각 2구씩 배치하여 주심도리 장설을 받쳤다.
  관아문의 서북측에 건립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외동헌(外東軒)은 건물 4면으로 반칸씩의 퇴칸을 둔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을 2단을 두고 조성하여 4각 주초석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워 기둥 상부에 무출목 이익공계통으로 구성하였고, 창방 위에는 운공이 끼워진 소루(小樓)를 각칸에 3개씩 배치하여 주심도리를 받쳐 주도록 하였다. 동헌의 내부에 우물천장을 만들어 가구재를 은폐시켰으며, 건물외부 중앙칸 처마 밑에 서령관(瑞寧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외동헌과 관아문의 걸립연대는 현 서산시청 본관 건립을 위해 그 자리에 있던 외동헌을 현재의 자리로 이축하기 위해 1976년도에 해체시 대들보에서 고종 8년(1871년) 서산군수인 오병선이 동헌과 관아문을 건립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서산시 홈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