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태안-00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충남발전 연구원 발핼/1999), 충청 마을지킴이-당진문화원/1999'

 

001
이종일선생 생가지(李種一先生 生家址)
Lee Jongil Birth Site

 

대 지 위 치 ;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1 외1
지 역 지 구 ; 취락지구
주 요 용 도 ; 주택
준 공 년 도 ; 조선시대
대 지 면 적 ; 3,183㎡
등 록 일 자 ; 1990.12.31
문화재 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제85호

 한말 독립운동가인 이종일(1858-1925)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1986년 원래의 생가터에 집을 복원하였고 사당은 1990년 완공하였다.  생가는 동향집이며, 6칸 겹집으로 ㄴ자집형 평면의 초가집이다. 북쪽과 동쪽에 각각 2칸을 달았다. 남쪽으로부터 건넌방·대청·윗방·안방이 각 1칸씩이고, 부엌이 2칸이며, 전퇴에는 마루를 깔았다. 앞으로 달아낸 날개에는 북쪽으로 문이 있으며, 그 동쪽으로 방 2칸이 있고, 주변을 돌담으로 돌렸다. 서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있다.      
옥파 이종일은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에 상경,
김윤식(金允植), 이상재(李商在)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2년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개화문명을 접하고 귀국하였다. 1894년 보성고교 교장에 취임한 이래 경향각지의 7개 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한편 민중을 깨우치고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일본의 침략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언론에 종사하였다. 1898년《제국신문》을 한글로 간행하였으며, 《황성신문》 《대한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월보과장을 지내고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인쇄소 사장에 취임하였다. 3·1운동 당시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하였고, 직접 낭독한 장본인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한국독립밀사》를 집필하였으며,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인적이 드문 장소로이 잘 가꾸지고, 잘 다듬어 지나는 사람들의 쉼터로 교육의 장소로 쓰여지는데, 경내에 식재되어 가꾸고 있는 왜향나무는 좀 어색하다.

 

002
백화산성(白華山城)
Baekhwa Sanseong Fortress


대 지 위 치 ;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산 41-2
주 요 용 도 ; 산성
규         모  ; 높이 3.3m 둘레 619m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1287년)
등 록 일 자 ; 1984.5.17
문화재 지정;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2호

태안읍에서 북측으로 학암포 해수욕장으로 나가는 지방도를 따라 가다보면 , 공군부대 푯말이 나선다. 이정표를 따라 놓여있는 산길을 20여분 오르면, 삼면이 훤히 트인 해발 284m 높이의 백화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 봉화대와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산성은 1287년(고려 충렬왕 13)에 축조된 것으로 백화산 정상에 위치한 석성(石城)이다. 태안군 내 성곽 중에서 제일 먼저 축성된 성이고, 소성현(蘇城縣) 때 태안 읍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 지형에 쌓아 외적의 접근이 어려운 요새 역할을 하였다. 성은 원래 둘레 619m, 높이 3.3m이었으나 현재 태을암(太乙庵)의 동쪽 약 100여 m 지점에 있는 성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성내에는 2개의 우물이 있었고,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있어 동쪽으로는 서산(西山)의 북주산(北主山), 남쪽으로는 부석면(浮石面)의 도비산(島飛山)과 봉화로 연락하였다.

 

003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泰安 東門里 磨崖三尊佛立像)
Taesn Samjonbul Image Carved on Rock Surface/Buddhist Statue


대 지 위 치 ; 충남 태안군 태안읍 원이로 78-132 (동문리)
주 요 용 도 ; 불상
준 공 년 도 ; 삼국시대
지 정 일 자 ; 2004.8.31
문화재 지정; 국보 제307호  

 마애불상의 초기 예로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하여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2구의 불입상은 양감 풍부한 얼굴에 크게 번지는 미소,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장대한 체구, U자형 주름과 y형 내의가 보이는 착의법, 도톰한 듯 날카로운 대좌의 연꽃무늬 등 세부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양식 특징을 보인다.
 좌우 두 불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로 물러나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높은 관에 아무런 무늬도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길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원만상이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으며 배 앞에 모은 두 손은 오른손을 위로 하여 보주를 감싸 쥔 이른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나타내고 있다. 불신의 하반부가 노출되어 백제시대의 연화대좌가 확인됨으로써 그 도상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상 요충지에 자리함으로써 6세기 중반 경 중국 북제양식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서산 운산면 용현리 소재의 마애여래삼존불상에 앞서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의 마애불상으로 꼽힌다.

 

004
상옥리 가영현가옥(上玉里-家屋)
House of Ga-Yoenghyun

 


대 지 위 치 ; 태안군 태안읍 상옥리 816 (속말1길 816)
지 역 지 구 ; 취락지구
대 지 면 적 ; 1,023㎡

대 지 면 적 ; 261㎡

주 요 용 도 ; 주택
준 공 년 도 ; 18세기 후기
문화재구분 ; 전통건조물 제 4호 (1987.4.10), 충남민속자료 제17호(2001.6.30)

  본채는 200여년전인 18세기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녀, 문간채는 1940년대에 새로 건립하였다. 야산을 배경으로한 동남향의 전통가옥으로 앞쪽에 사랑채가 있고, 후면에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서측에는 부속채로 안마당을 막고있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 초가집이다. 사랑채는 'ㄱ'자 평면이지만 동측의 광이 반칸 정도 커지면서 'ㄱ'자가 되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一'자형에 가깝다.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양 측면에 반칸씩 퇴칸을 달아 길이로 보면 정면이 5칸이 된다. 가운데 중문간을 두고, 동측에 사랑방 2개, 서측에 온돌방과 외양간을 두었다. 동편 온돌방 주위로는 툇마루를 돌렸다. 모서리 부분 마루를 가장 높게 만들어 마치 작은 정자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남측의 2칸 툇마루도 서로 높이를 달리하여 작은 공간에서 독특한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마루에는 '亞'자문 난간을 설치하여 작은 초가집에서 여유 있는 장식성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동측에 2칸통의 큰 부엌과 곳간, 문간을 두었다. 안방 서측에 대청마루와 건너방, 마루방을 두었다. 안마당은 횡으로 긴 장방형이며, 서측의 부속채와 사랑채 사이에 작은 통로를 두어 앞마당과 안마당을 연결시키고 있다. 3채의 건물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이와 같은 뜰집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사랑채 평면은 완벽한 'ㄱ'자 집이 아니며, 후일 증축과정에서 덧달아낸 것으로 보인다. 서측의 부속채는 터진 안마당을 감싸기 위해 나중에 증축하였다. 구릉을 배경으로 남향하고 있으며 가옥 앞으로는 넓지는 않지만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주변에 민가는 많지 않으며 서남쪽에 떨어져 1가구가 이웃하고 있다.
 배치를 보면 전면에 'ㄱ'자 평면의 사랑채가 있고, 후면에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 평면의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서측에는 부속채를 두어 안마당을 감싸도록 만들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 초가집이다. 동측에는 조금 떨어져 외양간, 창고가 있다. 벽을 두지 않고, 기둥과 지붕만 있다. 근래 지어진 것이다. 사랑채는 'ㄱ'자 평면이지만 동측의 광이 반칸 정도 커지면서 'ㄱ'자가 되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一'자형에 가깝다.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양 측면에 반칸씩 퇴칸을 달아 길이로 보면 정면이 5칸이 된다. 가운데 중문간을 두고, 동측에 사랑방 2개, 서측에 온돌방과 외양간을 두었다. 문간에는 동벽에 붙여 부뚜막을 설치하였고, 동편 온돌방 주위로는 툇마루를 돌렸다. 툇마루는 높이를 달리 만들었다. 모서리 부분 마루를 가장 높게 만들어 마치 작은 정자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남측의 2칸 툇마루도 서로 높이를 달리하여 작은 공간에서 독특한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마루에는 '亞'자문 난간을 설치하여 작은 초가집에서 여유있는 장식성을 보여주고 있다.
 약한 구릉에 건물을 세우기 위해 사랑채 정면에 4자 높이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괴석으로 사랑채 기단을 만들었다. 초석은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썼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동측에 2칸통의 큰 부엌과 곳간, 문간을 두었다. 안방 서측에 대청마루와 건너방, 마루방을 두었다. 안방 앞열은 퇴칸으로 하여 툇마루를 깔았다. 이 때문에 안대청과 툇마루가 연결되었다. 사랑채와 같이 막돌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썼다. 안마당은 횡으로 긴 장방형이며, 서측의 부속채와 사랑채 사이에 작은 통로를 두어 앞마당과 안마당을 연결시키고 있다. 안채 뒤뜰은 막돌로 담을 쌓고 장독대를 두었다. 마을과 떨어져 자라잡고 있는 이 가옥은 전형적인 뜰을 가지고 있는 초가이다. 3채의 건물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이와같은 뜰집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사랑채 평면은 완벽한 'ㄱ'자 집이 아니며, 후일 증축과정에서 덧달아낸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를 증축으로 사랑채에 중문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안마당이 생겼으나 서측은 건물이 없어 마당이 터지게 된다. 말하자면 안마당이 막히지 않아 개방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서측의 부속채는 이러한 터진 안마당을 감싸기 위해 나중에 증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부속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방과 부엌을 꾸며 별채로 사용하고 있다.

 

005
흥주사(興住寺)
Heungjusa

 


대 지 위 치 ; 태안군 태안읍 상옥리 산1154 (속말1길 61-61)
주 요 용 도 ; 사찰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준 공 년 도 ; 1527년
문화재구분 ; 만세루 충남 유형문화제 제 133호 (1990),

  백화산(白華山) 중턱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修德寺)의 말사(末寺)로 경사지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축된 사찰이다.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전설에 따르면 222년(구수왕 9)에 흥인조사(興仁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백화산성(白華山城) 내 군영사찰로 1417년 산성과 함께 창건된 것으로 보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두 설 모두 정확한 근거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지며, 현존하는 유물 등을 볼 때 흥주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28호)은 구조나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1993년 만세루를 해체하였을 때 1527년(중종 22)년에 건립한 뒤 1691년(숙종 17), 1751년(영조 27), 1798년(정종 22)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이후에도 1944년에 해체 복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외에 1722년(영조 48)에는 원통전을 중수하였다는 내용을 적은 기록이 있어 원래 흥주사의 주불전은 원통전이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흥주사에는 18세기 후반에도 불사가 있었던 것 같다. 원래 대웅전에 있던 후불탱화는 1861년(철종 12)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화였는데 지금은 수덕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지금 흥주사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입구 있는 은행나무이다. 흥주사 만세루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22m, 둘레 8.5m에 달하는 나무로 수령 900살이라고 한다. 은행나무의 상태는 양호하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 156호로 지정되었다. 태안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老巨樹)로서 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데, 최근에는 곁가지에 남근모양의 가지가 발견되면서 이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모이고 있다.
특히 불임부부가 이 나무에 기도를 하면 영험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널리 알려졌는데, 실제로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후 임신하였다는 예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