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건축

전통건축 예산-00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대전충남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1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
Daeungjeon of Sudeoksa/Temple

대 지 위 치 ;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
지 역 지 구 ; 산림보존지구
주 요 용 도 ; 사찰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구          조 ; 단층맞배지붕 주심포계
준 공 년 도 ; 1308년/고려 충렬왕 34년
문화재구분 ; 국보 제 49호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고전양식을 완성시킨 건물로 평가되는 왕조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한국목조건축의 백미이다. 앞서 세워진 된 두건물에 비해 기둥의 간격도 넓어지고 구조에 대한 해석도 더욱 명쾌 해졌으며, 특히 측면에 나타나는 세련된 입면 비례는 목조구조만이 줄 수 있는 강건한 비례감각과 공예품에서나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조형의식을 보여준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우뚝 서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오직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년)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년), 영조 46년(1770년)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 (1803년)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창건에 관련되어 전해오는 것으로는 백제 때 지명대사(智明大師)가 '북부 수덕사'를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지명대사는 신라승이므로 북부 수덕사 창건과는 관련이 없다. 동명으로 지명대사(知命大師)가 있으나 백제 위덕왕(554년-598년)때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인물이어서 수덕사와는 관련이 없으며 백제후기 또는 고려 초기에 절이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은 1937년 수리공사를 할 때 화반 하단에 쓰여진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이 묵서명에 의하면 1308년(고려 충렬왕34)에 건립하였다 한다. 그 후 조선 중기인 1528년에 단청보수, 1751년과 1770년에 각각 대웅전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정갈하게 다듬어 만든 장대석으로 높은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를 사용하였다. 기둥에는 배흘림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공포는 주심포식으로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워 주두를 놓은 공포를 짜 올렸다. 모든 주두와 소로 굽에는 약한 곡선과 굽받침이 있다. 첨차의 하단부는 연꽃주변의 곡선을 응용한 연화두식 초각을 새겨 두었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시대 목조건축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기법이다. 종보위에 '人'자 모양의 소슬합장이 있으며 보위에 걸친 우미량은 구조적 완벽성과 함께 장식적 의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대웅전의 목구조는 완벽한 건축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기법으로, 마치 공예품과도 같이 다른 솜씨가 뛰어나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한국의 건축(대한건축사회/1988),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002  
추사 김정희 고택(秋史 金正喜 古宅)
Old House of Chusa Kimjeonghui


 

대 지 위 치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지 역 지 구 ; 취락지구
규          모 ; 266㎡
주 요 용 도 ; 주택
준 공 년 도 ; 1750년경
문화재구분 ; 충남유형문화재 제 43호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생가로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에 의해 건립되었다. 추사는 1786년 6월 3일, 이곳에서 부친 이조판서 노경(魯敬)씨와 모친 기계 유씨(杞溪 兪氏)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 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ㅁ자형의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이밖에도 추사 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인 홍문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북쪽으로 600m정도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는데 백송은 중국 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 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예산의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 1980년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수술하여 치유하였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영조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전에는 행랑과 바깥문채, 곳간채가 대지의 전면과 남측마당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대문쪽에서부터 대청과 사랑방 2칸이 이어지고 안채쪽으로 꺾인 부분에 두칸 마루방과 온돌 1칸이 연접되어 있다. 방과 대청의 전면으로 반칸의 퇴마루가 연결되고 사랑방 끝에 반칸을 내어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1고주 5량집에 납도리를 쓰고 홑처마에 알추녀, 엇선자 등 간결한 구조이다. 안채는 서편 중앙에 동향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6칸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익랑을 연결하였다. 안방쪽은 1칸반, 건너방쪽은 1칸통으로 방과 부엌, 헛간 등을 배열하고 전면 옆에는 중문간과 광을 배치했다. 트인곳이 없이 완벽한 '口'자 집이다. 안대청이 높고 안마당의 크기가 작아 폐쇄감이 강하다. 구조는 중심몸채가 1고주 5량집인데 비해 다른 부분은 3량 맞걸이집이다. 호서지방 반가에서는 대개 안마당을 조금 크게 튼 '口'자 집으로 하고 안대청을 높지 않게 만드는데 비해 추사고택 안채는 작고 폐쇄적이다. 전체적인 배치계획은 사랑채와 안채를 완전히 분리하고, 넓은 마당을 만들어 여유스러운 모습으로, 사랑채 기둥에는 많은 주련을 달아두어 추사선생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고택이 위치하고 있는 신암면 동편에 무한천, 서편에 삽교천이 좌우에서 신암면을 감싸듯 북으로 흐르다 합치어 서해로 빠져 들어간다. 이 두 개천 주위는 들이 형성되고 개천 사이는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구릉 가운데 용산이 솟아있고 이 용산을 배경으로 추사고택이 동향을 하고 있다. 고택 전면으로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지고 좌우로는 용산 자락이 등을 받쳐주듯 형성되어 있다. 지방의 토호로서 중앙에서 오랫동안 벼슬을 한 사대부들의 세거로 내려왔던 까닭에 충청도 서해안 지방에선 흔치않은 '口'자형 평면으로 안채와 'ㄱ'자 평면의 고패집 사랑채를 갖춘 품격있는 조선조 후기의 반가이다.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중문이 곁들인 행랑과 바깥문채, 곳간채가 대지의 전면과 남측마당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후대가 이어지지 않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심하게 퇴락 되었던 것을 수년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집의 뒷산에서 흘러내린 지세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가 서에서 동으로 된 긴 축선을 따라 배치되고, 지금은 훤하게 터진 넓은 마당이지만 마당 사이에는 사잇담장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ㄱ'자 평면의 사랑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후면에 '口'자 모양의 안채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남측 담에는 작은 협문을 설치해 두었다. 사당은 안채 후면에는 축대를 높이 배치해 두었는데 사랑채와 안채의 축선을 벗어난 북편에 치우쳐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대문쪽에서부터 대청과 사랑방 2칸이 이어지고 안채쪽으로 꺾인 부분에 두칸 마루방과 온돌 1칸이 연접되어 있다. 방과 대청의 전면으로 반칸의 퇴마루가 연결되고 사랑방 끝에 반칸을 내어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사랑방옆의 작은방은 시중드는 수직방이나 객실로 사용된 듯 하다. 단간인 대청과 연접된 두칸 마루방 사이엔 불발기 창호를 달아 필요시 분합문을 들어열면 넓은 공간이 된다. 사랑채 전면에는 낮은 석단을 두른 화계를 만들어 두고, 기둥마다 걸린 주련이 한데 어울려 당시의 고풍스런 양반의 자태를 보는 듯 하다. 1고주 5량집에 납도리를 쓰고 홑처마에 알추녀, 엇선자 등 간결한 구조이면서도 동편 측면에 눈썹지붕을 달아 풍우를 막도록 하였다. 눈썹지붕은 흔히 만드는 것이 아니어서 독특하다. 사랑채 후면에 있는 안채는 낮은 단차로 분리되어 있는데 사랑마당과 안마당 사이에는 담을 두지않아 매우 넓은 마당으로 보여진다. 처음에는 이 두마당 사이에 담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는 서편 중앙에 동향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6칸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익랑을 연결하였다. 안방쪽은 1칸반, 건너방쪽은 1칸통으로 방과 부엌, 헛간 등을 배열하고 전면 옆에는 중문간과 광을 배치했다. 트인곳이 없이 완벽한 '口'자 집이다. 안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은 장대석 두벌대로 기단을 높이고, 양 익랑채와 광채는 단을 낮추어 높낮이가 확연하게 구분되고 있다. 이렇게 안대청이 높은 것은 영남지방 반가에서 흔히볼 수 있는 것으로 이렇게 만들면 안마당의 크기가 작아지고 폐쇄감이 강하다. 안채의 구조는 중심몸채가 1고주 5량집인데 비해 다른 부분은 3량 맞거리집이다. 넓은 대청의 전퇴부 고주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대청공간을 구획 활용하게 했다. 안방의 위와 옆 둘레에 고방과 골방을 배치, 안주인 생활영역을 넓혀주었으며, 건너방 밖으로도 반칸퇴에 판문을 설치한 마루방으로 꾸며 안사랑과 같은 기능과 사랑마당의 출입을 편리케 하였다. 또한 안방, 건너방에 달린 부엌칸은 외면벽에만 판문을 두어 전후의 뜰과 통하도록 하고 안마당쪽 벽면은 모두 개방해 두었다. 이러한 구조는 외부에서 보면 폐쇄적이지만 안마당쪽은 개방적이다.
 추사고택의 안채공간은 호서지방 반가에서 흔치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마당을 트인부분 없이 '口'자로 만드는데 크기를 작게하고, 안대청을 높게 만든 것이다. 안채의 이러한 공간구조는 영남방것과 흡사하다다. 호서지방 반가에서는 대개 안마당을 조금 크게하고, 안대청 부분을 그리 높지않게 만든다. 특히 안마당은 건물로 완벽하게 감싸안고 어딘가 틔여두는 튼'口'자형 구조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이와는 대조적인 배치가 되었다.

참고문헌; 충남의 건축(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1999), 한국관광공사 사이트,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

 

003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 紅門)
Crimson Gate in honor of Princess Hwasun

 


대 지 위 치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수          량 ; 1동
규          모 ; 정면 8칸, 측면 1칸
재          료 ; 목재, 석재, 기와
준 공 년 도 ; 정조 연간
문화재구분 ; 유형문화재 제 45호/1976.1.5.

 추사고택 바로 옆에 월성위 김한신 묘 옆에 있는 이 홍문은 안으로는 주춧돌만 덩그런히 놓여있어 더욱 쓸쓸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조선 영조의 둘째 딸로서, 13세에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결혼한 화순옹주의 열녀정문(烈女旌門)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한 김한신(1720-1758)은 벼슬이 수록대부(綏祿大夫) 오위도총관(五衛都總管)에 이르렀다. 부군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옹주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영조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영조는 부왕(父王)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정문(旌門)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대에 정조가 내렸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약 200여평의 대지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 중앙의 오른쪽 칸에 정문을 내었고, 문의 정면에는 홍살을 세우고 문 위에는 붉은 칠을 한 현판(懸板)이 걸려있다.

 

004  
월성위 김한신묘(月城尉 金漢藎墓)
Tomb of Wolseongwi Kim Hansin

  
 

대 지 위 치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수          량 ; 1기(基)
준 공 년 도 ; 1758년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189호/1984.5.17.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1720-1758)과 화순옹주(和順翁主)와 합장묘(合葬墓)이다. 이 합장묘에는 특이하게 돌담장이 둘러있고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의 묘석을 구비하였다. 특히 비문에는 영조의 어필이 세겨져 있다. 묘막은 당초 53칸이었다고 하나, 소실되었고 현재는 초석만이 남아있는데, 근간에 그 부지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 한 김한신은 벼슬이 수록대부 오위도총관에 이르렀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로서 김한신과 결혼하여 부군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바로 앞 구릉에는 정조가 내린 열녀정문이 있고, 같은 구내에 추사고택도 있다.

 

005
이남규선생 고택(李南珪先生 故宅)

Yi Nam-gyu's Old House

 

  

대 지 위 치 ;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4-2
수          량 ; 3동
규          모 ; 별당 정면 6칸, 측면 3칸
재          료 ; 목조
문화재구분 ; 충남유형문화재 제63호/1976.7.7.
준 공 년 도 ; 1637년(인조 15년) 1846년(헌종 12년)

 구한말 의사인 수당(修堂) 이남규선생은 1855년(철종5년)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이호식(李浩植)의 아들로 태어나 참판을 지냈으며, 일인들에 의해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나자 격분하여 낙향하였다. 을사조약 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위정척사운동을 벌였으며, 1907년 의병과 관련이 있다하여 투옥되었으나 계속 항거하다 왜군들에 의해 온양의 평창에서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 가옥은 이남규 선생의 십대조 한림공 이 구(李 久)가 1637년(인조15년) 건립한 것으로 한림공의 부인 완산이씨 행장에서 밝혀졌다. 1985년 이 가옥을 보수하면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1846년(헌종12년)에 중수하였다 한다. 마을 동편의 봉수산(鳳首山)마루가 남으로 흐르다가 그 한자락이 서편으로 빠지면서 작은 능선을 만들어 마을의 배산이 되었다. 마을 앞에는 작은 들이 횡으로 길게 이어지고, 동편의 계곡에서 발원된 개천은 방산저수지에 머물렀다가 마을 앞을 서쪽으로 흘러 달천과 합쳐 흘러간다. 마을길에서 이 집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사랑채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안채가 있다. 사랑채인 평원정(平遠亭)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정면과 동측은 퇴칸이다. 동측 퇴칸은 부엌이며, 부엌상부에는 누다락을 두었다. 부엌에 이어서 큰 사랑방이 남측으로 2칸 통칸이 되고 그 북측으로는 4분합 미닫이로 두칸이 나누어져 문을 열면 전체가 통칸이 된다. 두 방의 북측벽은 판자벽에 쌍여닫이로 되어 있고, 큰사랑방에서 대청으로는 3분합 들어열개가 달려 있고, 전면 2칸 대청의 각칸은 4분합 띠살문 들어열개로 되어 있다. 대청 남측 전칸에 비해 북측에는 반칸의 마루가 머름중방이 설치된 위에 조금 높게 있고, 북측벽은 각간 쌍여닫이로 되어 있다. 대청마루와 1칸 반의 작은 사랑방 사이는 큰사랑방과 마찬가지로 3분합 들어열개로 되어 있어서 전체가 통칸이 될 수 있다. 작은 사랑방 뒷쪽 반칸은 함실과 상부는 반침으로 사용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각칸의 전면에는 퇴마루로 이어지며 특히 큰사랑방과 작은 사랑방 앞에는 따로 막아서 전면은 4분합 큰 정자살창으로 측면은 쌍여닫이 띠살문이다.
 현재는 없어졌으나 그 퇴마루를 연결하여 안채마루로 바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붕이 설치된 통로가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작은 협문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격리시킨 담이 안채를 둘러싸고 있다. 안채 정면에 행랑채가 있고, 행랑채에 달려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두칸의 마루방과 이 방에서 꺾여 여섯칸 통칸의 넓은 안대청이 있으며 대청을 지나서 안방이 두칸, 북측으로 웃방이 한칸 이어져 있다. 그리고 안방과 웃방에는 동측면에 수장공간이 반칸씩 이어져 설치되어 있고 안방에 따로 3칸의 넓은 부엌이 있다. 부엌 상부는 다락을 두어 안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서쪽 익랑의 남측 2칸은 부엌이고, 이 부엌 상부에도 건너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다락방을 두었다. 부엌의 북측은 건너방, 마루방, 퇴마루가 있다.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같은 수법으로 안채는 대청쪽에서 중문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져 약 2자높이의 기단을 만들었다. 초석은 사랑채의 큰 사랑방 전면에만 방추형 주초석이고, 나머지는 모두 커다란 덤벙초석를 썼다. 기둥은 7치각 크기의 방주를 세웠다. 기둥머리 부분에서는 철띠를 둘러 기둥의 균열을 방지하도록 했고 그 위에 초익공으로 공포를 짠 다음 보 밑은 양봉으로 보강하였다. 장혀위에 올린 도리는 모두 굴도리를 쓰고, 대들보위에 짧은 동자주를 세운 다음 종보를 걸었다. 종보 위에는 높은 사다리 모양의 판대공을 세우고 그 위에 소로와 장혀를 올린 다음 다시 뜬 창방이 결구되어 있다. 천정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안채의 우측 끝은 맞배지붕이고 대청 정면만은 부연이 있는 겹처마로 되어 있다.
 이 가옥의 배치구조는 사랑채를 별도로 서측에 두고, 안채와 행랑채를 동측에 튼'口'자 형태로 배치시켰다. 일반적으로 반가에서 사랑채는 안채의 전면에 배치하여 인접시키는 것인데 여기서는 서측에 횡으로 독립된 별채와 같이 배치한 흔치않은 경우이다. 따라서 이 가옥에서는 사랑채가 별당의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어 사랑채의 크기가 다른 곳에서보다 규모가 크다. 일반적인 반가로 보면 사랑채가 들어설 위치에 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과 같이 이러한 배치구조는 안동 천전의 의성김씨 대종가의 배치구조와 흡사하다. 사랑채에는 편액이 특히 많은데, 평원정 외에 정심당(正心堂), 청좌산거(靑左山居), 담화당(湛和堂) 등의 당호가 걸려 있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6
이광임선생 고택(李廣任先生 故宅)

Yi Gwang-im's Old House

 

대 지 위 치 ;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334
수          량 ; 2동
규          모 ; 사랑채 정면 7칸, 측면 3칸
재          료 ; 목조

문화재구분 ; 충남유형문화재 제83호/1978.12.30.
준 공 년 도 ; 1870년(순조 25년) 조선후기

 조선 선조때의 대신 이산해의 9대손인 선비 이광임이 1870년(순조 25년)에 건립하였다. 사랑채는 조선 말 그의 아들 이승우가 증축한 것이라 한다. 고택이 있는 마을 주변 지리환경는 동편의 천방산(千方山)이 험준한 자락을 남북으로 이으면서 극정봉과 봉수산으로 연결된다. 천방산의 한자락이 서편으로 내리 뻗으면서 방산리의 남쪽을 막아 큰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계곡에서 흐른 물은 마을 서편 아래에서 저수지에 모였다가 상항리 들로 흘러 나간다. 고택은 북편에 낚시터로 유명한 방산 저수지를 두고, 천방산을 안산으로 동향배치하고 있다. 동향으로 경사진 대지를 따라 전면에 긴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그 후면에 'ㄱ'자형 안채와 종방향으로 길게 행랑채를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튼 '口'자 집이다.
 안마당은 사랑채의 정면 칸수만큼 긴 장방형이다. 안채의 후면인 서측에는 경사가 급한 뒤뜰을 만들고, 측면인 북편에는 장독대와 우물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에 전후열과 서측에 퇴칸을 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2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을 두고, 동편에 루마루 1칸과 부엌 1칸을 전후로 배치해 두었다. 대청 서측에 1칸반 크기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이 온돌방 측면으로 퇴칸을 만들어 정면열 퇴칸과 연결시키고 있다. 대청과 안방의 후면 4칸에도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았다. 이 4칸의 퇴에는 외벽을 막아 골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측 부엌 상부는 루다락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부엌 정면의 루마루 1칸은 바닥을 높여 정면퇴마루와 연결하고, 정면과 측면 2면에는 머름을 달아 마치 정자와 같은 모양이 되게 하였다. 가옥의 동북편이 넓게 터져 조망이 좋은 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높아진 루마루 하부는 판벽으로 막아 광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 2단으로 하단은 두벌대, 상단은 세벌대로 쌓고 덤벙주초를 썼다. 기둥은 모두 방주를 쓰고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동측에 정면으로 3칸을 꺾어 달아낸 'ㄱ'자집이다. 한쪽 지붕은 팔작이고 부엌쪽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다. 평면은 가운데 회첨부분에 2칸통의 안대청을 두고 동측에 안방과 고방(웃방)을 배치하였다. 안대청 서측으로는 대청에서부터 건너방, 광, 제실(祭室), 객방(客房)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건너방은 안쪽에 벽장을 두고 앞쪽에는 안대청 마루와 높이기 다른 툇마루를 설치한 다음 마루 아래는 아궁이를 두었다. 광은 1칸통을 모두 하나의 실로 만들고, 그 상부는 다락을 두었다. 제실은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전면 1칸은 마루를 설치하고, 후면 1칸을 제실로 사용하고 있다. 객방은 제사에 참여하는 집안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방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측면에 2자폭의 좁은 쪽마루를 달아 두었다. 객방 정면 툇마루 하부에는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안채의 기단은 막돌로 2자정도 높여 만들고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세웠다. 급한 구릉에 위치하면서 자연히 기단이 높아졌다. 특히 'ㄱ'자로 꺾어진 부엌은 안마당과 높이를 맞추려한 때문인지 안대청보다 훨씬 높아졌다. 이 때문에 부엌 상부의 다락도 천정이 높아지게 되었다.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의 서측에 종방향으로 안마당을 막으면서 배치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우진각 지붕이다. 사랑채쪽 1칸은 중문간으로 사용하고, 이어서 광, 부엌, 행랑방을 두었다. 안채와 연접해 있으면서 안채와 별도의 두벌대 기단을 만들어 행랑채를 앉혔으며, 초석은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세웠다.
 배치는 동향에 가까운 동남향으로, 남향으로 약간 틀어 배치할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골안을 바라보는 형국이 되고, 또한 가옥의 배후가 터지게 되는 조망상의 약점을 지니게 된다. 이 가옥이 동향인 까닭을 알 수 있다. 입지조건에 있어서 전면의 평지를 두고 후면의 구릉지에 붙여 배치한 것은 전면의 사랑마당을 넓게 확보하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기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안채의 기단 역시 높지만 안마당이 답답하지 않은 이유는 마당의 전후좌우 폭을 넓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튼 'ㅁ'자집의 여유있는 호서지방 가옥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행랑채를 안채에 인접하여 종방향으로 배치한 것은 그리 흔치 않은 방법이다. 안채를 'ㄷ'자 평면으로 하여 익랑으로 만드는 경우 자연스럽게 아늑한 안마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가옥에서는 안채의 공간을 'ㄱ'자 평면으로 처리함으로서 긴 안채가 되었고, 자연히 안마당이 커지게 된 것이다. 반면 형식적으로는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되어 있지만 안채에 객방이 만들어지고 안마당을 행랑마당과 공유하는 등 엄격하던 내외구분이 점차로 모호해 지는 배치구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7
정동호 가옥(鄭東鎬 家屋)

Jeongdongho Residence

대 지 위 치 ; 예산군 고덕면 오추리 2구 568
문화재구분 ; 중요민속자료 제191호
준 공 년 도 ; 19세기 초

 야산구릉으로 둘러싸인 농촌마을의 전통적인 초가집으로 건축적 특징으로 보아 19세기초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택이 점지하고 있는 곳은 후면의 산자락이 이 가옥의 좌우를 감싸면서 청룡과 백호를 형성하고, 동측으로 비켜 물구멍이 열리면서 넓은 들과 이어진다. 배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안채, 곳간채가 튼 '口'자집으로 되어 있다.
 본채의 동편에는 별도로 1동의 창고 및 화장실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정면에 배치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전면열을 퇴칸으로 만들었다. 동편에 마루방을 두고, 서측의 대문간을 겸하는 부엌 건너로는 2개의 사랑방을 설치하였다. 동측의 마루방은 외부로 창을 두지 않고, 폐쇄시켰다. 대신 내부의 대문간에서 출입하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동측면 옆은 3.5자 폭의 퇴칸을 만들고, 이 퇴칸에는 벽이나 마루를 만들지 않았다. 기단은 막돌로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다. 다만 동측면 퇴칸에는 원주를 사용하였다. 사용한 부재는 근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였다. 마루칸 뒤편으로 한칸 규모의 외양간을 덧붙어 'ㄴ'자 평면으로 만들고, 서측 사랑방 2칸 앞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부엌칸은 아궁이 함실과 창고를 설치하여 칸넓이가 3자정도 넓어졌다. 안채는 정면 5칸의 '一'자집 평면으로 전면에 퇴칸을 두었다. 동쪽끝칸 부엌 부분에 뒤로는 처마 밑을 이용한 반칸퇴를 내어 '나뭇간'으로 쓰고, 앞쪽엔 반칸퇴를 더 달아서 사방1칸의 부엌광을 설치했다. 부엌에 이어진 3칸 온돌방은 내부에 사잇장지문(미서기)을 설치, 안방과 웃방, 끝방으로 구획하고 필요에 따라 실을 터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안채의 구조는 중간에 내진고주를 세우고 반오량집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전면쪽은 장연과 단연을 이어댄 서까래 구성이지만 후면은 하나의 서까래만 얹은 까닭에 지붕의 길이는 전면쪽이 후면보다 훨씬길다. 이런 모습을 보완하기 위해 지붕마루가 몸채의 중심에 오도록 초가 지붕속에 짚을 더 채워 조절했다. 굴도리를 쓰고 기둥은 원주에 전면쪽은 방주를 썼다. 막돌 허튼층으로 비교적 높게 네벌대로 만들고 그 위에 안채를 세웠다. 부엌광 지붕틀은 중도리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종도리를 직각으로 걸쳐 'ㄱ'자로 구성했는데 지붕면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둥글게 마무리했다. 안마당 서편으로는 광채를 두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전형적인 농가이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광채로 폐쇄적인 안마당을 만들어 놓았다.
 구조적으로는 민가에서 흔히 사용하는 반오량구조나 맞걸이 3량집의 초가로 소박한 농가주택이지만 배치형태는 튼'口'자집 형식을 지니고 있다. 평면에 있어서 사랑채와 안채에 퇴간을 두어 방을 넓게 만들려는 의도가 보인다. 통나무 속은 파내 만든 굴뚝이나 토담 등은 일반 민가의 전형적인 구성요소이다. 집앞에 파놓은 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문헌 ; 충남대전의 전통주거건축/이왕기

 

008
삽교 석조보살입상(揷橋 石造菩薩立像)
Stone Buddhist Standing Statue at Sapgyo

대 지 위 치 ; 예산군 삽교면 신산리 산16
문화재구분 ; 보물 제508호/1969.6.21.
준 공 년 도 ; 고려시대

 2개의 돌을 이어서 조각한 석불로 충청남도 예산시 수암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같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 6각으로 된 갓 모양의 넙적한 돌을 올려 놓았다. 왜소한 어깨의 윤곽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조금씩 넓어지지만 양감이 전혀없이 밋밋하여 마치 돌기둥 같다. 왼손은 몸에 붙인채 아래로 내리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돌지팡이같은 것을 잡고 있는데 양 발 사이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다. 거구이면서 불륨없는 돌기둥 형태, 간략한 신체표현 방법 등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유사한 양식을 가진 지방적인 특징이 보이는 고려시대 작품이다.

참고자료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09
대흥 임존성(
大興 任存城)
Daeheung Imjonseong/Fortress

대 지 위 치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규        
  모 ; 937,686㎡
문화재구분 ; 사적 제90호/1963.1.21.
준 공 년 도 ; 삼국시대

 백제때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한 성이다. 봉수산의 꼭대기에 있는 둘레 약 3㎞의 산성으로,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우물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고 안쪽으로는 흙을 파서 도랑처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성의 네 모퉁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다른 곳보다 약 2m정도 두껍게 쌓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주류성과 더불어 백제 부흥군이 활동했던 곳으로, 사비성을 되찾기 위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이다. 이 성에서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했다. 또한 후삼국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이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도 전해지는 유서깊은 곳이다.

참고자료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사이트

 

010  
충의사(忠義祠)
Chungeuisa/Shrine

 

대 지 위 치 ;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27, 40-1
규          모 ; 147,072㎡
주 요 용 도 ; 사당
준 공 년 도 ; 1968년
문화재구분 ; 사적 제 229호/1972.10.14.

 예산에서 북서쪽 23km 지점인 매헌(梅軒) 윤봉길의사 사적지에 위치한 충의사는 일제시대 독립 투사인 윤봉길(尹奉吉;1903-1930)의사가 태어나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농촌계몽과 애국정신을 고취한 곳으로, 윤의사의 의거와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윤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써 홍살문과 삼문이 있으며 1968년에 건립되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의 애국충정을 기념하는 매헌문화제가 열리 며 윤의사의 귀중한 유품은 기념관에 전시되어 보물 제 568호로 보호 되고 있으며, 윤봉길의사 소택은 사적 제 229호로 되어있다. 본명이 우의(禹儀)이고, 별명이 봉길인 의사는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고, 성장한 집은 저한당(沮韓堂)이라 이름지었다. 2004년말  정면에 거치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쓴 휘호를 끌어내려 한때 뉴스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관광공사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