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건축

전통 건축물/중구-00

참고문헌; 대전의 건축-유병우,박만식 /1999. 대전광역시 중구 홈사이트, 특화닷컴 대전문화유산,

   

001
유회당(有懷堂)-기궁재(寄窮齊)
Yuhwedang-Gigungjae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
원 래 지 명 ; 산내면 무수리
건   립   자 ; 권이진
문화재구분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1989.3.18.
수 량 형 태 ; 건조 2동
규         모 ; 정면 4칸 측면 2칸
건 립 연 대 ; 1707년(숙종 33년), 1715년
문   화   재 ; 유회당(부 기궁재)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1989.3.18.
                   유회당 판각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1991.7.10.
                   유회당 유물 일괄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1989.3.18.

 사정동 대전동물원을 지나 언고개를 넘으면, 고속국도가 접하기 직전 우측으로 있는 유회당은 보문산의 남쪽 기슭의 비교적 경사가 심한 경사면에 위치하여, 앞으로는 무수동의 넓은 뜰을 향해있다. 유회당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영조 때의 공신인 권이진(權以鎭:1668-1734)의 호에서 유래하며, 이곳에는 유회당을 비롯하여, 삼근정사, 장판각, 기궁재, 상지문이 있으며, 유회당의 정면에 활수담이라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운치를 더하고 있다.
 유회당(有懷堂)은 활수담의 뒷편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비탈진 경사에 따라 삼단으로 축대를 나누어 쌓아 넓은 기단으로 삼았으며, 그 위에 자연석 기단를 쌓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건축하였다. 구조는 위와 같이 형성된 자연석의 기단 위에 전면은 네모뿔형 주초석으로, 후면에는 덤벙 주초석을 사용하여 그 위에 방형(方形)기둥을 세웠다. 또한 건물 전면에는 팔각형으로 다듬은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에는 창방과 함께 초새김을 하지 않은 장방형의 양봉이 건물의 내외 방향으로 결구되어 있다.
 중앙의 두 칸 통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넓은 대청마루를 만들고 그 좌우측에 각각 1칸 통칸의 온돌방를 대칭되게 배치하여 우측의 온돌방 위에는 불기제(不欺齊), 좌측의 것에는 구시제(求是齊)라는 현판을 대청을 향해 걸어 놓았다. 또한 정면의 양쪽면에는 반 칸의 퇴칸을 두어 평난간이 둘러진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우측 툇마루 부분에서는 돌출된 암석을 마루 높이와 같이 깎아서 그대로 남겨 놓았다. 지붕틀은 대청의 전후면에 같은 높이의 평주를 세워 대들보를 걸었으며, 지붕은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로 인하여 변형된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삼근정사(三近精舍)와 장판각(藏板閣)은 유회당 뒤편의 비탈진 경사면에 함께 위치한다. 삼근정사는 선친의 묘를 지키기 위한 시묘(侍墓)건물의 용도로서 권이진 선생이 숙종 41년(1715)에 건축하였다. 삼근정사의 평면은, 중앙에 방을 배치하고 양측면에 마루를 깔은 ㄱ자 형태의 평면을 가지고 있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삼근정사(三近精舍)라는 건물의 명칭 이외에도 '수만헌(收漫軒)', '하거원(何去園)' 등의 현판이 걸려있어 그 건물의 명칭이 다르게 불리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근정사'에서의 삼근의 뜻은 선친 권유의 묘, 담 옆을 흘러가는 시냇물과 그 시냇물 옆으로 우거진 철쭉이 서로 가깝다는 의미에서 삼근이라고 하였다 한다. 장판각(藏板閣)은 원래 사당으로 사용되다가 후에 후손들의 강학처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유회당 권이진의 시문집 246매를 보관하고 있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내부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전퇴칸에도 칸막이를 한 후 판장문을 달았다. 구조는 잡석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으며 5량집 맞배지붕 형태이다. 기궁재(寄窮齊)는 유회당 좌측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제실건물로서 평면이 ㄱ자형으로 구획되었는데 건물의 중앙부분에 2칸 통칸의 넓은 대청을 들였다.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1칸씩의 건넌방과 웃방이 있고 좌측에는 1칸반 규모의 안방과 1칸의 웃방 그리고 안방 옆으로 꺾이어 1칸반의 부엌을 들였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쌓은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민흘림 방형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상량문에 의하면 경신년(庚申年/1920년)에 중건한 것이다.

참고자료 ;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대전광역시 중구 홈사이트 유교유적, 대전 충남전통의 주거건축,
It's Daejeon/May 2004 대전광역시.

  

002
여경암(餘慶菴), 거업재(居業齋)와 산신당(山神堂)
Yeogyeongam, Geoeupjae & Sansindang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299
건   립   자 ; 권이진
문화재구분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지 정 일 자 ; 1989.12.13.
수 량 형 태 ; 건조 3동
규         모 ;  여경암-정면 5칸 측면 2칸
                   거업제-정면 6칸 측면 1칸
건 립 연 도 ; 1715년

 유회당과 묘소사이를 가로질러 뒷편으로 5분여 걸음의 보문산 자락에 위치한 여경암은 유회당 권이진(1668-1734)이 숙종 41년(1715년)에 후손들과 후학의 교육장소로 건립했다. 전체적인 건물배치는 남서향이며, 석축을 쌓아 만든 마당 뒤편에 계단식으로 단을 정리하여 여경암(餘慶菴)을 배치했고, 그 뒤 편으로 산신당(山神堂)이 위치하고 있다. 여경암 앞쪽에는 서당건물로 사용되었던 거업재(居業齋)가 있다.
 여경암(餘慶菴)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시 뒤편으로 2칸씩을 각각 덧붙여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 건축물이다. 정면 5칸 중 전.후면에 툇마루가 달린 좌측 3칸에는 온돌을 들여서 불당으로, 그 우측의 2칸 통칸은 넓은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ㄷ자의 날개부분의 우측은 2칸 모두 온돌방을 들이고 좌측은 각각 1칸씩 우물마루를 깐 대청과 온돌을 들여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자연석을 높게 쌓은 기단 위에 큰 주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주상부에는 주두를 놓고 량방향으로 간결한 양봉을, 그리고 도리방향으로는 양쪽에 소로가 끼워진 주심 첨차를 짜맞춰 간단한 형태의 포가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천정이며, 평난간이 둘려진 전면 툇마루 위에는 소라반자로 되어 있다. 지붕의 형태는 홑처마 8작지붕이다. 산신당(山神堂)은 고종 19년(1882년) 지은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불단을 만들어 탱화인 산신도(山神圖)가 걸려있으며, 구조는 자연석 기단 위에 방형기둥을 세웠는데 포는 무출목(無出目)의 초익공계통(初翼工系統)이며, 창방과 연결되는 주간에 4개의 소로가 끼워져 있다. 가구는 대들보 위에 낮은 제형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있다.
 거업재(居業齋)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측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아서 여름철 서당으로 이용하고 중앙 2칸은 온돌을 들여서 겨울철 서당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좌측 2칸에는 넓은 부엌을 들였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주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주상부의 포는 전면 우측 4개의 기둥 위에만 여경암과 같은 모양의 간결한 포가 짜여졌고 나머지 기둥 위에는 주두를 생략하고 장방형의 양봉만이 부분적으로 짜 맞춰져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직접 제형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함께 지붕하중을 받고 있는 3량집으로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전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요란한 차소리를 빼어놓고는, 대전 인근에서 남향받이로 위치한 가장 조용히 숨겨진 위치로 견주어지는 탐스러운 모습이 가슴을 여민다.

참고문헌; 대전 문화유적순례/1996,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003
봉소루(鳳巢漏)와 남분봉 유허비(南奮鳳 遺噓碑)
Bongsoru & Nambunbong Yuheobi/Lecture Hall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석교동 61-2
원 래 지 명 ; 외남면 석교리
건   립   자 ; 남분붕
문화재구분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5호
지 정 일 자 ; 1992.10.28.
수 량 형 태 ; 건조 1동
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건 립 연 도 ; 17세기 후반
중 수 여 부 ; 1714,1758,1972년

 한밭을 휘감고 있는 보문산의 동쪽 기슭에 범골부근에 자리한 누각으로 주변의 울창한 수림과 잘 어울리어 오가는 행인의 눈길을 끌고 있다. 조선시대 인조 때,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학자이며 교육자인 남분붕(南奮鵬,1607-1674)선생이 학문을 가르치던 서재로, 부제학 김경규(金敬圭)가 기문을 지었다. 선생의 호는 봉소재(鳳巢齎)로 봉소루도 본래 봉소재라 불리 웠다. 남분붕선생은 조광조의 학통을 이어받아 의리를 진작시키고, 선비들의 슬기와 재능을 널리 열어 주었다. 현종 15년에 세상을 떠난 후 통정대부, 형조 참의를 추증 받았다.
 원래 '봉소'란 봉황새의 보금자리라는 뜻으로 '봉소재'라는 명칭은 후진을 교육 양성하는 일종의 교육도장을 일컫는 말로 '끝없는 학문의 양식처를 만든다.'는 뜻이 함축되어있다.또한 봉소루가 있는 보문산 기슭이 봉소산이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보문산의 동편 기슭 경치가 좋았기에 봉소루 10경이 있기도 하였었다.
 이 건물은 숙종 40년(1714년)과 영조 34년(1758년)에 2층 누각에 팔작지붕으로 중수한 기록이 있다. 왼쪽 단층부분은 2벌대의 기단석에 장대석과 덤벙주초석을 깔고, 그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다. 특히 오른쪽의 2층부분은 외벌대 기단석 위에 둥근 돌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받치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가구는 1고주 5량집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2층루의 정면에는 봉소루 현판이 걸려있으며, 뒤편에 있는 안채에는 ㄱ자형 편면으로 웃방, 대청, 안방, 부엌이 있다. 안채는 해방전에 중수하였으며 봉소루는 1972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정갈한 형태는 울 안에 놓여있는 건물끼리 잘 어울리면서 당초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경내에 있는 높이 174cm, 폭 66.5cm, 두께 3.3cm 크기의 남분봉유허비는 송병관이 짓고, 이기복이 전각하였다.

참고문헌; 대전지역 누정문학 연구(허경진/1998), 문화재 대관(대전광역시/1997), 대전문화 유적 순례/1996,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004
보문산성(寶文山城)
Bomun Fortress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산3-45
문화재구분 :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0호/1989.3.18.
면          적 ; 7,180

건 립 연 도 ; 백제시대

 백제시대에 축성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서 백제시대 산성 중 전국에서 처음으로 완전 복원되었다. 보문산의 남쪽 해발 406m의 산 정상부에 쌓은 이 산성은 봉성(鳳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 말기 신라와 전투가 치열하던 시기에 축조된 산성으로 성 둘레는 30m에 불과하지만 인근 산성들과 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중요시 되어왔다. 성벽은 자연지형에 따라 간단하게 가공한 네모진 석재를 사용하여 적심방법(積心方法;돌채움 방법)으로 축조하였는데, 동북부의 암반으로 형성된 급경사면은 성벽을 쌓지 않았고, 성벽의 바깥면은 조금씩 안쪽으로 둘러 쌓아 성벽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발굴 당시 가장 잘 남아있던 서남쪽 성벽은 16단으로 3.42m에 달하였다. 또한 발굴조사 결과 남문터가 확인 되었으며, 현재의 주 된통행로인 북문이 고려시대에 성문폭을 좁혀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지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대전시에서 이 성을 다시 수축하고 장대를 세우는 등 성을 새롭게 수축하였다.
 보문산성은 대사동에 위치하고 있는 보문산 정상인 시루봉(표고 457.3m)에서 동북쪽으로 800m 정도 떨어져 있는 표고 406m인 지봉(支峰)에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이 정상부분이 아닌 지봉에 축조하게 된 것은 이 지봉이 보다 동북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동쪽으로는 대전천이, 서쪽으로는 유등천(柳等川)이 내려다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형성된 대전관내에서 펼쳐져 있는 충적평야에 대한 관측이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전-금산간의 도로가 내려다 보이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계족산(鷄足山)-식장산(食藏山)을 연결하는 산성군을 비롯하여 대전관내에 위치하고 있는 대부분의 산성등과 서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문산성은 산성 유적에 대한 학술자료 및 복원·정비를 위한 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1990년 3월 12일부터 4월 20일까지 40일간에 걸쳐 윤무병 교수팀에 의하여 발굴·조사되었다. 이산성의 평면형태는 네 귀가 둥근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북-동남의 길이는 약 100m, 동북-서남의 너비는 40m로 성주위는 수평길이로 280m가 된다. 성체는 대부분 자연지형에 따라 적심방법으로 화강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석재는 보문산에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는 흑운모화강석재(黑雲母花崗石材)를 채취하여, 외면을 가공한 성석을 바른층 쌓기로 축조하였다. 돌과 돌사이에 빈틈이 얼마 생기지 않았으므로 작은 석판(石板)을 끼워서 면을 맞추게 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축조방법이 비교적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최하단에서 2-3단까지는 수직으로 쌓아 올렸는데 그로부터 상부의 벽면은 60°-70°가량되는 경사를 이루었다. 동북벽의 급경사면은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석축하지 않았다.
  산성의 동벽과 서벽은 산중복에 해당되는 경사면에 축조되었으므로 협축식(夾築式)이 아닌 내탁식(內托式)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동·서벽에 대하여 각1개소씩 절개 발굴을 시도했는데 성벽 내부에는 상당한 양의 적심석들이 채워져 있었다. 이 적심석층은 대개가 화강암이 풍화된 지반에 밀착된 것으로 보아 지표면에 있던 부식토층을 제거한 후 축조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곳에 따라서는 지형을 계단식으로 삭토하여 근석(根石)을 놓은 후 그 위에 적심석층을 형성한데도 있다. 동쪽 성벽을 절개한 곳에서는 적심석층과 지반층 사이에 얇은 퇴적토층이 있었으며 이 토층에서 민패토기(무문토기:無文土器)와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의 구연부 파편이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대전 문화유적순례/1996,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005
보문산 마애여래 좌상(寶文山 磨崖如來 坐像)
Mt.Bomun Maaeyeorae Jwasang/Rock Carved Buddhist Statue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석교동 산7-1
용         도 ; 불상
규         모 ; 높이 320cm 얼굴길이 80cm 무릎너비 230cm
문화재구분 ; 유형문화재 제19호
건 립 연 도 ; 고려시대 후기

 부사동 사거리에서 금산쪽으로 조금 향하다 오른편에 있는 신일여고를 지나, 복전암에서 보문산성을 향해 700m쯤 오르면 보기드물게 바위에 음각된 석좌상이 있다. 보문산성의 동쪽 아래편으로 높이 6m, 폭 6m 가량의 편편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남측에 세겨진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은 보기에도 넉넉하고 우아한 모습이다. 이 좌상의 머리는 나발위에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통견의의 법의를 걸쳤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었고 왼손은 배 위에 얹었으나 수인은 마멸이 뚜렷하지 않다. 불상의 주위에는 둥근 두광과 신광을 세겼는데 광배의 바깥 윤곽선은 선으로 음각하고 내부는 정으로 쪼아 내서 광배의 윤곽을 뚜렷히 하였다. 눈을 가늘게 내려 뜨고 목이 짧으며 앉은 자세는 약간 불안하다. 광배를 단순하게 처리하고 옷주름이나 불상의 윤곽을 간략하게 처리하였는데 이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참고문헌;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006
창계 숭절사(滄溪 崇節詞)
Changgye Sungjeolsa/Shrine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안영동 560
용         도 ; 사당
문화재구분 ; 문화재 자료제2호/1989.3.18.
건 립 연 도 ; 1923년, 1977년 중수

조선시대 이래로 동구 가양동에 있는 정절서원에서 박팽년을 비롯한 여러분을 모시고 제향을 받들어 왔으나 고종 8년(1871년)에 서원이 훼철되자,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모셔 제사를 지냈는데, '창계(滄溪)'란 유등천을 달리 일컫는 말로 안영 톨게이트있는 부근으로 남부순환 고속국도변이다.
 숭절사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1417-1456)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한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1408-1456)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다.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은 1685년(숙종 11년) 건립된 것이 처음이다. 강원도 관찰사 홍만종(洪萬鐘)이 영월에 있는 노산대군의 사당 수리를 청하였고, 영월부사 조이한(趙爾翰)과 더불어 6신의 사당을 그 곁에 건립하기를 의논하였다. 사육신과 호장 엄흥도(嚴興道,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했을 때 시신을 수습)의 신위를 모시고 '육신사(六臣祠)'라고 하여 송시열이 액자를 썼다. 1709년 영월 유생 엄세영(嚴世英)이 상소하여 '창절(彰節)'이라 사액하였는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홍리에 있다. 1971년에는 생육신(生六臣)이었던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을 배향하였다.
 1804년(순조 4년)에는 순조가 '박심문의 충성과 절의는 6신에 못지 않다.'라는 글씨를 손수 써주면서 그에게 이조참의를 증직하였고, 1828년에 창절사에 배향하게 하였다. 원래 대전지역에서 사육신과 관련된 인물을 배향했던 곳은 동구 가양동 흥농(興農)에 1719년(숙종 45년)세워진 정절서원에서 송유(宋愉)·박팽년·송갑조(宋甲祚)·송상민(宋尙敏)·김경여(金慶餘)·송국택(宋國澤)등 대전 지역과 관련된 6명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정절서원은 고종 8년에 훼철되었고, 대전 지역에서 단종 때의 절신(節臣)을 모신 곳은 모두 없어졌다. 그후 박심문과 박팽년을 모신 숭절사가 건립되었다. '절사기(崇節祠記)'에는 사당이 건립되게 된 연유가 간략히 소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6신들의 사당을 세운 곳은 그들의 고향이나, 거주지 그리고 묘소가 있는 곳에 세웠으나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사당을 세운 것이 없다. 따라서 박심문은 후손인 박연황(朴淵璜)이 창계에 거주한지 여러 대가 되어 조상을 추모하고자 사림들의 여론을 모아 집 근처에 사당을 세워 '숭절사'라는 현판을 달고 박심문과 사육신중에 이 지역과 연고를 같이 하는 박팽년을 함께 배향하였다." 숭절사는 1977년에 세워졌고, 그 후 외삼문과 강당이 계속 증축되었다. 구조는 야산을 배경으로 동향하여 1983년에 세워진 외삼문이 있고, 외삼문의 안으로 들어가면 1978년에 증축되어 상의당(尙儀堂)이란 현판이 붙은 강당이 있다.
 박팽년은 본관이 순천(順天)으로 한석당(閑碩堂) 중림(仲林)의 아들이다. 그가 살았던 동구 가양동(더퍼리)에는 유허비가 보존되어 있다. 박팽년은 1434년(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成三問)등과 함께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어 각종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 수양대군(세조)이 황보인·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박팽년은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잡혀 죽었다. 박심문은 본관이 밀양으로조선 세종 때 집현전학사와 부제학을 지낸 박강생(朴剛生)의 셋째 아들로서, 아버지와 두 형이 모두 일찍 돌아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장성하였다. 29세(세종 1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여진을 몰아내고 남도민을 이주시킬 것을 건의하여 6진개척에 공을 세웠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양군의 임진 나루로 집을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년)에 명나라에 질정관에 임명되어 굳이 사양했으나 피할 수 없이 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  개 등과 단종복위를 논의하였다.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현재 창계숭절사에는 후손들이 해마다 제사를 드리면서 박팽년과 더불어서 박심문의 충절을 사모하고 있다. 또한 밀양 박씨 청재공파 대동보소에서는 '청재박선생 충절록'을 간행하여 박심문의 충절을 찬양하고, 이를 번역하여 널리 읽도록 하고 있다.
 

참고문헌;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대전광역시 중구 홈사이트 유교유적, 대전문화재 알림터

 

007
송씨 양세 정려(宋氏 兩世旌閭)
Sossi Yangse Jeongryeo/Movement Tablet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127-2
용         도 ; 비각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43호
건 립 연 도 ; 1988년 11월 재중수

 원래 '숙인 윤씨 통덕랑 송공두언 양세정려(淑人 尹氏 通德郞 宋公斗源 兩世旌閭)'로 알려진 이 정려각은 보문산 오거리에서 보문산으로 가는 좁은 옛 길로 약100m정도 오르면서 오른편 골목의 주변택가로 둘리어진 곳에 있다. 숙인 윤씨는 부호군 벼슬을 한 송기학의 아내인데 그녀는 1665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손자인 송두원이 상제가 되어 애통한 마음으로 삼년상을 마치니 주위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여, 이소문을 들은 조정에서 영조가 정려를 내렸다. 그 뒤 연재 송병선이 지은 중수기가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008
중암사 부도(中庵寺 浮屠)
Jungamsa Bodo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정생동 671, 685 묘각골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11호/1989.3.18.
건 립 연 도 ; 조선시대

 보문사 시루봉의 남서측 줄기에 자리한 이 중암사를 찾아가는 길은 평범치는 않다. 대전동물원으로 향하다가 고개를 넘어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정생동 보건지소가 있는 부근에서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부터 4.3km정도 좁은길을 따라 올라간다. 중간 부근에 저수지를 끼고 돌아 비포장 차도를 따라 산등상이로 오르다보면 끈길 듯한 느낌이 들때, 차를 돌릴수 있는 작은 평지가 나오면서 부도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중암사에서 입적한 선사들의 부도로서 1784년에 건립된 월영다의 부도외에 6기가 남아있다. 금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표고465m의 천비산(天庇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절 입구를 지나 돌층계 앞에 이르러 낡은 비석(碑石)이 서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중암사는 연혁이 자세하지 않으며 현재의 절은 함석지붕의 민가형 가옥에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고 있다. 중암사의 서남쪽 약5-60m 떨어진 곳에 산의 중턱을 깎아 석축으로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6기의 부도를 세웠다.
①한월당부도(漢月堂浮屠); 전체 높이 140cm로 8각형의 이중 기단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두었으며 그 위에 옥개를 얹었다. 앞면에 한월당이라고 새겼다. ②추월당부도(秋月堂浮屠); 120cm x 100cm의 화강암 기단 위에 8각형의 연화무늬가 새겨진 받침위에 석종형의 탑을 두었고 옥개석을 얹었다. 높이는 150cm이며 앞면에 추월당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③천봉당부도(天峯堂浮屠);140cm x 90cm의 치석된 화강암 기단 위에 연화무늬를 조각한 원형의 받침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다른 부도와 달리 옥개석이 없는 석종형 탑신이다. 높이는 150cm이며 앞면에 천봉당대사봉선이라고 음각으로 새겼다. ④홍파당부도(泓波堂浮屠);130cm x 85cm의 4각형 기단위에 앙련을 조각한 원형의 받침석을 두고 그위에 석종형 탑신을 두었다. 4각 지붕모양의 옥개를 얹었고 앞면에 홍파당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⑤수월당부도(水月堂浮屠); 120cm x120cm의 방형 기단위에 원형받침대를 두고 그 위에 석종형 탑신을 얹었다. 옥개석이 없는 양식이며 높이는 150cm이다. 앞면에 수월당이라고 새겨져 있다. ⑥월영당부도(月影堂浮屠);120cm x 90cm의 장방형 기단위에 둥근 받침석을 두고 석종형 탑신을 얹었다. 전체 높이는 약170cm이다
 그리고 부도 옆에 탑비(塔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禪敎兩宗大禪師月影堂代察之塔'이라고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崇禎三甲辰四月 立'이라고 새겨져 있어 건립 연대가 1784년(정조 8년)로 탑비의 높이는 160cm이다. 다른 6기 부도는 중암사(中庵寺)에서 입적한 선사(禪師)들의 부도로서 양식상 조선 후기의 부도로 파악된다.
 부도는 고승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이나 사리를 안장한 곳이다. 중암사는 금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465m의 천비산(天庇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이 중암사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 등의 초상을 모신 영정각이 있었다고 전하며, 임진왜란때는 의병승장(義兵僧將) 영규대사가 금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갑옷과 창검을 두고 공주의 갑사로 돌아가서 숨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을 창건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요각사터라고 불리워지며, 현재 불당으로 쓰이는 함석지붕의 사찰 몇채가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중구문화 길라잡이-대전중구 문화원/1998, 대전광역시 중구청 홈사이트, 대전문화재 알림터

 

009
보문사지 석조 (普文寺址 石槽) 와 초석(礎石)
Bomunsaji Seokjo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산1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10호/1989.3.18.
수          량 ; 1기
건 립 연 도 ; 고려시대

 보문산 남쪽으로 무수동에서 전통음식체험현장을 지나서, 산등성이에 오르면 어수선한 주변으로 반기는 터이다. 현재 파헤쳐진 중앙에 놓여 있는 석조는 고려시대 사용한 식수용 석조로 추정된다. 보문사는 확실한 창건시기와 폐사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유적으로 보아서 고려때부터 조선시대말기에 걸쳐 존속하였던 사찰로 추정된다. 현재 건물터 5개소가 남아 있으며, 석조를 비롯하여 괘불지주(掛佛支柱), 맷돌, 세탁대, 물레방아확 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한 탄방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연혁지(沿革誌)에 의하면 보문사, 동학사, 고산사, 율사(栗寺) 등에서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서원을 세우는데 출역케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문사는 승군을 보낼만큼 큰규모의 사찰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법등(法燈)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는 사각형이 밑바닥이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물빠짐구멍이, 위에는 여수구(餘水口)가 주전자의 꼭지 모양으로 되어 있어 흐르는 물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산길을 내려가며 여경암에 이 석조보다 규모가 작고 거칠게 다듬어진 석조가 있다. 여기에 석수(石手) 영찬(永贊)이 쓴 기록이 있으며, 보문사지 물레방아 돌의 앞면에 새겨져 있는 것도 석수영찬으로 동일 명문(銘文)이다.
 절터의 추정위치는 보문산 정상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능선에 있다. 절터의 범위는 동서 약 70m, 남북 약 50m 정도로 남쪽을 향한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3단을 이루고 있다. 아랫단에는 길이 10여m, 높이 1m에 달하는 축대가 쌓여 있으며, 앞면 6칸·옆면 2칸의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두번째 단에는 2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파괴가 심하여 건물의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제일 윗단 앞에는 축대 바로 밑에 괘불 지주 한 쌍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 윗단이 대웅전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절터에서 발굴되는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은 주로 조선시대의 유물들이다.

참고문헌; 대전문화재 알림터

 

010
국사봉유적 (國師峰遺蹟)  
Guksabong Remains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산30-1
규          모 ; 둘레 25cm
문화재구분 ; 문화재자료 제38호/1995.5.27.
건 립 연 도 ; 조선시대

 무수동 마을 뒷산에 해발 245m의 국사봉이 있으며, 유적은 국사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동서축의 능선 정상에 축조된 석축으로 동서 8m, 남북 5m, 둘레 25m에 달하며 유적의 남서쪽과 북쪽은 자연 암반에 의지하여 석축을 조성하였고 석축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붕괴된 석축사이에서 토막난 토마(土馬)를 비롯하여 자기편과 와편이 소량 수습되었다. 자기류는 청자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이 있고 와편은 매우 조잡한 태토로 소성된 것이다. 토마는 두부(頭部)와 동체(胴體)를 함께 만들고 다리, 꼬리, 눈, 안장 등은 별도로 제작하여 붙였다. 소형의 토마(土馬)들은 입, 코 갈기 등 세부 표현이 사실적이며 회청색 또는 회백색의 색조를 띤다. 이 유적은 석축의 규모가 작고 토마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제사유적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대전광역시 중구청 홈사이트, 대전문화재 알림터